“ 그래, 유스티체. ”
이제 널 이해해도 괜찮겠니.
Raven Ermesinde Elroy Chevalier
이름 :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나이 : 만 19세
성별 : 남성
학부 : 기사학부-검술과
슈발리에 최연소 백작 , 영지의 제 1 권력자
외관 : 백발 벽안 혈색도는 얼굴
188cm / 군살없는 단단한 몸매
흰머리가 푸른 눈을 살짝 덮는다, 향유로 가꾼 머리카락은 치지 않고 내리 길러 이제는 허리까지 흘러내린다. 머리를 빗어주던 유모도 이제는 기운이 쇠해 새로운 하녀를 들였다. 짧은 머리의 젊은 하녀는 머리에 손을 댈 때마다 짧게 탄식하며 즐거워한다. 뒷머리에 비해 조금 짧은 앞단의 머리를 말아주는 것이 가장 즐겁다나. 치장에는 취미가 없어 지나친 시중을 무르고 자연스럽게 흩날리게 두고 있다. 어릴 적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머리는 달빛 아래서 빛을 발한다. 마른 근육들은 완전히 자리 잡혔고,따라서 자세도 늠름해졌다.
어릴 적부터 내보이던 울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텅 빈 표정뿐이다.
잘 익은 살구빛, 혈색 도는 얼굴은 건강해 보인다. 왼쪽 눈 아래로 눈물점이 두 개 자리하고 있다. 입술을 깨무는 버릇을 고쳤다. 의식적으로 무표정을 짓기를 반복하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화가 나면 핏물이 날 정도로 입안을 짓씹지만, 감정적이 될 상황 자체를 기피하게 되니 그럴 일도 드물다. 화려한 귀걸이 취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알이 크고 빛나는 맑은 아쿠아마린을 눈물처럼 가공한 것을 제일 좋아한다.
표정이 단조로워졌다. 여전히 웃고 가끔은 분노하지만 진심이 아닌 경우가 더 잦다. 웃어야 할 때 웃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며, 평소에는 냉철을 연기한다. 설익었던 듀오적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제는 무슨 상황을 마주해도 허탈한 표정과 함께 부드럽게 넘기곤 한다. 손바닥은 붉고 흰 흉터로 가득하고 쥐면 굳은살과 흉터 자국 덕에 끔찍한 촉감. 항상 착용하던 흰 장갑은 이제는 영애들의 손을 잡거나, 외출을 할 때에만 착용한다.
옷은 시종들의 손에 의해 반듯하게 풀 먹인 채 단정하게 입혀져 있다.
그는 완벽하다.
성격 :
신중한 탐사자 / 실리주의자 / 오만한 절대자 / [수동적인 기만자]
온화한 슈발리에 백작님만큼 완벽하신 분이 계실까요?
슈발리에 백작님이요? 그분은...
신중하십니다. 서신을 작성하실 때는 또 어떠신가요, 절대 잉크가 번진 채로 봉투 안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신답니다. 사소한 일에 임하실 때도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라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시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아오시죠. 그 비결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성공이 보장된 길에만 발을 내딛는다는 점이 아닐까요.
사교계를 멀리하시지만, 그렇다고 영애를 대하는 태도가 서툴지는 않으신 백작님. 그저 수줍음이 많으실 뿐일 거예요. 그도 그럴게, 트레스 1년째에 알망드, 카보트, 루르, 미뉴에트, 사라반드, 파바느와 쿠랑크를 완벽하게 추실 수 있게 되었는걸요. 다정하신 분, 비록 아린델 후작 영애와의 혼약 약속은 깨져버렸지만 흠이 있으신 분은 아니랍니다. 본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다정하세요.
레이븐 도련님이요? 그분은...
실리적이시죠. 본인에게 득 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세요. 다른 분들께도 마찬가지예요. 그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시죠. 모호한 관계를 제일 질색하세요, 이유 없는 호의는 빚지는 기분이라며 끔찍해하시고요. 한 번은 제가 도련님의 호의로 몇 주 쉬고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감사한 마음에 가지고 있던 목돈으로 작은 진주 핀을 선물해드리자 질겁을 하시더라고요. 좋은 품질의 장신구는 당연히 아니었습니다만...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글쎄 왜 절 위해 봉급을 쓰지 않았느냐고 나무라시기 시작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면서도 베푸는 일에는 그렇게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빈센트 엘로이 슈발리에 -편히 잠드소서- , 그러니까 도련님의 부친 시절보다 영지의 상황이 나아진 편이에요. 뒤늦게나마 산사태로 가족을 잃은 영지민들의 의식주를 조금씩 지원해주시면서 날카롭던 분위기도 조금 가라앉은 상탭니다.
레이븐, 나의 아쿠아마린. 그 아이는...
이 집안의 절대자야. 옛날에는 내 말을 잘 듣곤 했었는데 이제는 가끔 늦은 밤에 다가와 다정한 말을 건네는 정도구나. 얼마나 말도 잘 듣고 착하고 예쁜 아이였는지 몰라. 표정은 시무룩하고, 울음도 많아 눈가가 항상 붉어서 걱정했는데 지금은 어엿한 가주가 되었단다. 아버지와 정말로 꼭 닮았어. 밤마다 몰래 서재에 놀러 가 엘로이의 이야기를 읽더니 그 충성심과 순종하는 자세만큼은 정말 일류 기사의 것 아니겠니. 황제 폐하의 훌륭한 검이 될 거야. 빈센트도 이 모습을 봤다면... 좋아했을 텐데.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는...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열화 된 의지 그 자체다. 내면의 설익은 알맹이를 들킬까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숨을 죽이고 있다. 분신과 같은 날, 같은 무게로 태어났으나 그와 나는 수평 위의 추와도 같다. 나는 무게에 천천히 침잠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중 그의 것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타인들이 바라는 대로 착한 아들, 완벽한 가주, 온화한 도련님, 훌륭한 학생이 되었으나 정작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웃음 하나조차 웃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만 내비치고는 했으니 그 위치에 걸맞지 않게 얼마나 소심하고 수동적인가. 이러한 모습은 그의 부모에게 있어서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잘 길들여진 사냥개로 자라났으나 정작 주인의 명령 없이는 그 자리에서 일어설 줄도 모르고 굶어 죽어갈 운명인 것. 그것이 자의라는 것이 없는 레이븐의 운명인 듯했다.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명령은, 홀로 남은 순간에도 완벽하게 의무를 다할 것.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에게 가장 두렵고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장례 날, 그는 타인의 의지를 뒤집어쓰기를 선택한다. 어떤 선택을 내릴 때에도 자신이 아닌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할지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모호한 선택지들을 골랐다. 수직으로 꽂히는 권위의 압박에 익숙한 그는, 그만큼 절대자의 자세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본인이 사냥개로서 자라난 것처럼 다른 이들을 개처럼 부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부당함을 지적하지 않는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파도스의 24일에 탄생.
父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현 가주 및 전 서리 기사단 소속 기사 (死)
母 비아트리스 아이텐샤 엘로이 슈발리에, 전 영주 대리인 및 저택의 관리자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백작.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가문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가주 자리에 오른 남자.
1.
제국력 1035년 이포모니의 다섯째 날 13시, 전 가주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편히 잠드소서- 가 영면했다. 공교롭게도 그에게 전할 서신을 작성하고 있던 순간 그 소식이 레이븐에게 전달되었다. 당일 울린 승전보를 아버지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무거운 짐과 같았으나 정작 그 소식을 받아보아야 할 절대자가 시체가 되어버렸음을 알리는 작은 서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스완 영애에게도 내용을 전달하라는 말에 직접 그의 방에 걸음하여 서신을 건네고 돌아나오는 날, 그는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웃음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함부로 경멸할 수 없었다. 그저 의무와 무게의 이동이 이뤄지고 있음을 직감했을 뿐이다. 이는 그의 안에 남은 작은 자의에게 내려진 일종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모두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아버지의 죽음에도 그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보였다. 누군가는 의젓하다고 말했으며 누군가는 비인간적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명명하던 냉소적인 태도가 이질적이라는 의견만은 동일했다. 그런 말에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 것 뿐이라고 멍하니 제 자리를 지키는 도련님 대신 다른 사람이 대신 대꾸해주었다.
2.
저택은 후계자인 작은 도련님의 사지를 재고 한 뼘 단위로 찢어보며 자리에 부합한 사람인지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설익은 태도는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기에는 어설펐으며, 발을 구르는 걸음걸이는 종종 경박스러웠고, 자주 감정적으로 변해 눈을 붉히는 모습은 추잡했으며, 상처를 만들고 덧내는 습관들은 기가 막혔다. 시종들은 사교계며 정치계며 할 것 없이 일찍 도마 위에 올라 무참히 칼질 당하게 될 레이븐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이 결점들을 모조리 매끈히 갈아내고야 말겠다고.
그는 아쿠아마린이었고, 칼날들은 그를 세공하는 마땅한 손길이었다.
비아트리스 아이텐샤 엘로이 슈발리에는 남편의 죽음 이후 심적인 병을 얻어 기운이 쇠해 영지 대리인의 역할을 내려놓고, 레이븐이 직접 선발한 소수의 영특한 하녀들과 함께 칩거에 들어갔다. 따라서 행정 관련 업부는 그의 누이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가 15살의 나이부터 지도받아 처리해왔다. 스완은 틈을 파고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저에게 꽂힌 틈을 타 저택의 그림자 안에서 여러 득을 취해 자신의 발판을 다져가는 모습을, 그는 쏟아지는 빛 아래에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저택의 사람들은 이런 관용을 의아하게 여기며 동생인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의 자리를 위협하려 들지는 않을지 염려했다. 슈발리에는 바뀌지 않는다. 슈발리에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야한다. 그의 그 생각만은 여전히 굳건했으나 그는 분신의 탈선을 용인했다. 방관하며 말리지 않았다. 침묵은 곧 지지로 읽혔다.
듀오 3학년의 과정을 끝마치고 검을 쥐겠다고 전과 신청을 한 스완에게 충고의 탈을 쓴 비난이 쏟아지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어미 비아트리스 만큼은 멍청한 것이 끝내 어릴 적 꿈을 놓지 못했다며 비난했다. 수그러든 모친의 기상에 스완은 더는 주눅들지 않았다. 가문의 사업에 손을 대어 빼낸 개인 자산을 내새워 독단으로 전과 신청을 하고도 안정적으로 학비를 지불할 수 있는 독자적인 경로를 만들어 2차 진급 시험 이후 아예 저택을 떠나 수도에서 생활하기에 이르른다. 이에 대해서도 가주가 될 네가 입장을 확실히 해야한다며 비체가 날카롭게 지적했으나 침묵 외에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레이븐은 저택에 남겨진 번뜩이는 누이의 눈과 귀도 잘라내지 않았다. 대신 말이 지독히 없어졌다.
3.
듀오 3학년, 아린델 샤릿테 예 사르반 후작 영애와 혼약을 위한 만남을 가지고 작은 규모의 약혼식을 진행했었다. 함께할 때 모습이 퍽 다정하고 애틋하여 잘 어울리는 금슬 좋은 한 쌍이 될 것이라며 양 가문에서 오가는 말들은 많았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뜻을 거두고 갈라서게 된다. 일찍이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 영애의 가문 내에서의 미묘한 위치와 흔들림 없이 굳건해야 할 슈발리에 가문 내의 혼란의 씨를 감지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아린델 영애는 손 발이 하얗고 가녀려 사르반 후작 내외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며 자라왔으며, 그만큼 귀한 딸을 다른 집안의 혼란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정중한 서신에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가 직접 답을 해 오가는 혼담을 정리했다. 누이가 있어 혼인의 압박에도 어느 정도의 유예가 있었다. 비체는 못마땅해 했으나 더는 혼약자를 구인하지 않았다.
4.
걸맞는 자만이 이 자루를 쥐도록 하라.
1038년 리고르의 달에 누이없이 가주 계승식을 치뤘다. 빈센트가 지정한 서기가 엘로이 슈발리에의 초상 앞에서 전 가주의 유언, 가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력, 동시에 황실의 검으로서 기억해야 할 의무를 읽어주는 것이 계승식의 기본적인 틀이었다. 무릎꿇은 레이븐의 달 아래 핀 꽃 같은 흰 머리칼 위에 뿔 안에 담아둔 진한 향유를 뿌리고 황제로부터 하사받았다는 그 검으로 양 어깨와 머리를 천천히 짚는다. 그는 눈을 감고 불려진 모든 권력과 의무를 기억하겠다고 답하는 것으로 슈발리에 백작이 되었다.
계승식에 참여했던 이들의 입술 위를 꾸준히 오르내린 화제는, '백작의 누이, 스완 유스티체 슈발리에는 어디에 있는가?' 였다. 슈발리에 쌍둥이가 완전히 갈라섰으며 누이인 스완이 감춰두었던 뱀과 같은 탐욕을 드러내어 순진한 동생을 집어삼키려 든다느니, 슈발리에의 굳건한 정통성이 이 탓에 깨어지는 것이 아니냐며 입방아를 찧어댔다.
슈발리에가 부리는 시종들은 레이븐의 느슨한 관용 속에서 지나친 사견을 덧붙여가며 숙덕거리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마땅한 대가는 저택에 돌아온 영지의 실질적 주인, 스완이 그들에게 치루게 했다. 전 가주 빈센트 - 편히 잠드소서- 때부터 현명한 조언으로 가주의 곁을 지킨 충신들이었으나, 그들은 누이가 불러온 새 바람의 향을 맡지 못하는 오래된 목석들이었다. 입이 가벼운 자들과 어찌 큰 일을 도모하겠냐는 말과 함께 슈발리에를 의심한 이들을 모조리 저택에서 내쫓는 모습도, 레이븐은 그저 바라만 보며 다시 들이지 않았다. 예외로 그에게 찾아와 무릎꿇은 소수의 시종들의 복직을 허락해 열일곱 어린 나이에 갖춘 그 잔인함에 모두를 질겁하게 했다.
영지에는 누이의 처분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더해졌다. 첫번째로,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있겠다. 가주인 동생의 관용을 등에 업고 있으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 눈에 드는 것도 없는 게 분명하다는 비난조였다. 둘째로, 슈발리에 가의 보수적인 가풍은 과거의 잔재와도 같으니 '성별을 이유로 학생이 가지는 배움의 자유에 침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며 그녀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저택의 사람들은 스완을 두려워함과 가주의 지나친 관용에 불만을 품었다.
5.
누이인 스완의 약혼도 상대의 일방적인 통보로 파토나기에 이르렀으니, 그 이유는 검을 쥔 여자를 들일 이유도 여유도 없다는데 있었다. 그들은 빈센트와 비아트리스가 그러했듯 인형처럼 희고 보기 좋고 다루기 쉬운 영애를 원했다. 힘없이 그들의 뜻에 따르고 다정한 목소리로 가주 옆에 앉아 필요한 조언을 조심스레 할 시종이 필요했다. 정작 당사자는 알지 못했던 것인지, 아카데미까지 찾아와 철없이 눈물을 흘려대며 애원하는 추태를 부렸다는 소식이 레이븐의 귀까지 들어왔으나 이는 오히려 흠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도마 위에 올랐을 스완을 구해준 것이 다름없는 미련함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코웃음을 치며 넘어갔다.
쌍둥이의 혼담이 모두 흐려지고 그 이후 배우자를 찾는 것 같은 움직임도 전무하니 슈발리에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1038년의 늦봄, 성공적으로 데뷔탕트를 마친 후 그런 소문은 종식되었다.
가문의 상징인 보석과 장미, 그리고 금테로 꾸며진 파티용의 백색 마차를 타고, 둘은 황실 무도회장에 함께 도착했다. 백토 들판의 무덤에 피어난 흰 꽃처럼 얇고 꼭 끼는 창백한 드레스와 정장을 입고 서로를 향해 배운대로 다정하게 미소짓는 두 남매의 모습은 가히 기록될 만큼 완벽하게 박제된 우아함이었다. 품이 넓은 흰 소매 끝에 달린 레이스 사이로 드러나는 손은 둘 다 흰 장갑으로 가리고, 허리와 손을 잡고 샹들리에 밑에서 흐르는 새벽 바람처럼 몸을 움직인다. 귀와 손, 옷 위마다 작게 수놓아진 아쿠아마린이 빛을 받아 번쩍이며 빛났고 이는 그들의 시대가 막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처럼 당당하며 아름다웠다. [개인이 곧 가문이 될 수 있으며, 말 한 마디로 정치판 위의 어떠한 말이 될 수도 있다는 무게를 자각한 이들의 발걸음은 완벽했다.]
6. 슈발리에 영지에는 제국 전체의 상황을 축소한 것처럼 세 가지 파벌이 존재한다.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의 혁신적인 행보에 찬성하는 자들과, 그들의 온화한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가 엄연한 백작이자 영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누이가 지나치게 손을 넓힌다며 비판하는 자들로 둘로 나뉘었고, 그들 사이에서 영지만 잘 지켜지면 그들 쌍둥이가 내전을 일으키든 - 불경한 말이지만 - 사랑에 빠지든 한낱 자유 신민이 상관할 마 있느냐고 한 발 물러서는 자들도 있었다.
슈발리에 쌍둥이는 그러한 여론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밝히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레이븐은 정통성을 대표하듯 여전한 황태자 지지 의사를 밝혔고, 스완은 선황녀를 지지함을 암묵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아 지적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에 머물러 레이븐 곁의 왕당파 충신들도 함부로 그의 누이를 비난하지 못했다.
- 어머니 비아트리체와 더는 함께 생활하지 않는다. [트레스 2학년 겨울방학 도중 '요양'이라는 목적 하에 수도에 매입해둔 작은 저택으로 보냈다. 스완과 레이븐의 모든 일에 불만을 표출하며 사사건건 옳지 않다고 말하는 태도에, 단지 부모라는 이유로 베풀 아량이 부족했던 스완이 국경에서 살기엔 너무 쇠약해지신 것 같은데, 안전한 수도로 요양을 가시면 어떻겠느냐고 웃으며 말을 꺼낸 것이 발단이었다. '감히'로 시작하는 말과 함께 성화를 내려던 비체는 예상 가능했으나 곁에 앉은 레이븐이 넌지시 덧붙인 말은 상당히 의외였는데, 침묵하거나 말리는 것이 아니라 저희도 이제 다 컸으니 가서 푹 쉬시라는 말로 스완에게 동조했기 때문이다. 가주의 말엔 제아무리 아들일지언정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비아트리체는 끝내 고집을 그만두고 수도로 떠났다. 레이븐이 직접 선택한 시종들과 함께였다. 바야흐로 완벽한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 방학마다 빠짐없이 저택으로 돌아와도 승마와 검술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듀오 1학년 때 루카스 솔렌 블랑샤 영식에게 선물받은 백마를 길들이는데에는 특히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여 시종들이 유난하다는 평을 내렸다. 이름은 마리 앤. 흰 가죽 위에 얇게 두드린 금장과 아쿠아마린을 물린 등자와 고삐를 달아 마구간지기가 아주 부담스러워 했다.
- 아버지인 빈센트를 닮아 매년 키가 꾸준히 커왔다. 비아트리스의 관리 하에 놓여져 몸매 관리를 위해 금식을 하던 스완과는 달리 식사의 제한도 두지 않고 운동과 스트레칭을 매일 하며 시종장과 신장 체크를 주기적으로 해왔다.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사소한 생활 양식과 신체 조건부터 차이가 나야 한다는 그의 조언 때문이었다. 따라서 매년 평균 4센티미터씩 꾸준히 성장하여 살아생전 185 정도의 거구였던 빈센트보다도 더 크게 된 모양. 요즘은 근육과 맵시 관리를 위해 하루에 두 끼정도로 식사 횟수를 줄였고 성장이 더뎌질 무렵과 맞물려 더 자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듀오 시기 받은 검은 서재에 걸어두었고, 그와 닮은 진검을 다시 만들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선물하는 검이 아닌, 스스로가 쥐기를 결정한 검은 묵직한 슈발리에의 강철로 만들어졌다. 보석을 물렸지만 투박한 가공을 거친 경도가 높은 것을 알째로 물렸고, 그 손잡이에는 푸르게 색을 입한 양가죽 띠를 둘러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파멀은 묵직한 강철을 두드려 날선 모습으로 가공하고 색을 입혀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짝을 이루는 방패에는 화려한 보석따위 박혀있지 않으나 얕게 홈을 파 은을 입혀 장미 덩굴을 그려낸 세밀하고 정교한 모양이라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곤 한다.
- 흰 토끼 아델레이드는 듀오 1학년 시기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듀오 2학년 접어드는 시기 운명했다. 어수선한 가문 분위기 덕분에 제대로 된 무덤도 만들어주지 못하고 가문의 소각장에 무심하게 버려지는 어이없는 끝을 맞았다.
-굽이 높은 신발들을 신는다. 보법을 연습하기 위해서다. 그 누구보다 조용히, 우아하게 걷기 위해 교양 수업때 택했던 방식이 탁월하게 성과를 내게 되면서 습관적으로 착용하게 되었다. 낮은 굽을 신을 때는 걷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약속의 무게를 알고 있다. 모든 약속은 그의 의무가 되어 함께한다. 검을 쥘 때 그것들을 잊지 않는다.
슈발리에 백작 가 家
전쟁 영웅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후손들
" 슈발리에의 아이를 짐승처럼 키워라. 헛된 것을 보는 눈을 가리고 주인의 충견이 되게 하라.
그 몸뚱이는 검집이요 의지는 검이 될테니, 오로지 제국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지어다."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연대기 중 발췌-
슈발리에 백작의 성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세 가지 가보가 있으니, 하나는 북 쪽의 벽에 걸린 피투성이 수급의 머리칼을 들어 올린 채 정면을 주시하는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초상화요, 하나는 그 업적을 기리며 황제가 그에게 하사한 명검, 나머지 하나는 역시 황제의 관대함과 축복으로 선물 받은 영지였다. 이 세 가지 보물들은 차례로 이어져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연대기이자 찬송가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1대도 아닌 13대 가주인 그의 이름이 후손들의 성 앞에 당당하게 자리 잡혀온 이유가 된다.
초상화는 가주의 서재를 열면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걸려있다. 수급에서 흐르는 핏물의 묘사가 당장 비린내가 날 만큼 생생함에도 이 초상이 흉물로 여겨지지 않으며 아이들에게도 숨김이 없는 것은 엘로이 슈발리에의 경건한 표정 덕분이다.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초상화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마저 꿰뚫을듯한 명료한 눈빛과 떨림 없는 손, 빛나는 검이 잘린 목이나 핏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엘로이 이후의 가주들은 이 황금 같은 초상화 앞에 제 아이들을 세워놓고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육한다.
작고 큰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던 정복전쟁의 시기, 기사의 명예를 지키고 귀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천성이 저돌적이며 위치의 무게를 알만큼 겸손하던 슈발리에 백작가의 적자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는 황실의 검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와 함께한 많은 검들이 부러지고 무뎌졌으며 이가 나간 것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척박한 전쟁의 바람 속에서 필멸자들은 상처를 돌보고 실력을 연마함과 동시에 그것이 순리인 듯 끝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엘로이 슈발리에, 위대한 기사요 용맹무쌍한 젊은이인 그는 운명에 순응할 생각보다는 그것을 도발하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어느 날 긴 원정으로 지친 기사단이 끝내 잠을 청하는 중에도 그는 깨어 불가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들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솟아오르는 불씨를 목격했을 때 그는 그것이 적이 피운 주둔지가 출처임을 직감했다.
실력으로 판가름했을 때, 엘로이 슈발리에는 결코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그를 가문의 영웅으로 만든 것은 그의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굳건한 신념이었다. 그의 원동력은 황실에 대한 복종, 개인의 욕심이 결코 아니었으며 나라의 부흥과 존경하는 이의 안존을 위한 것이었으니 무엇보다 순수했고 절대적인 힘이 되어주었다. 어두운 밤에 큰불을 피운다는 것은 근처에 적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고백이며 방어태세를 제대로 갖추고 있을 리 없다는 믿음 하나로 그는 기사단장에게 달려가 자신의 가장 충직한 다섯 맹우들과 함께 선발대에 설 수 있기를 간청했다. 깊은 밤, 밤의 새조차도 울음을 멈춘 시간에 여섯 기사들은 적의 목을 베기 위해 갈라진 땅 위를 디뎠다.
그는 결국 그의 검으로 적장의 목을 베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초상화에 그려진 그의 업적이다. 다섯 맹우의 호위와 지원군에 힘입어 엘로이는 큰 피해 없이 매복군의 완전 제압에 성공하였고 이 사건은 지친 원정으로 지친 제국군의 사기를 돋우는 데에 큰 기여를 하여 후에 임한 전쟁의 대승이라는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방심한 것을 노렸을 뿐이라는 겸손한 태도가 소문의 크기를 더욱 부풀려 속도를 얹고 수도까지 퍼져나가게 했다. 적장의 목을 베어 온 붉은 기사 슈발리에, 젊고 용맹한 엘로이. 끝내 황실에까지 닿은 소식을 들은 황제는 그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붉은 기사를 위한 루비를 박은 명검을 하나 준비한다.
그러나 왕과 마주한 붉은 기사의 눈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푸른빛의 젊음과 생기가 가득했다. 붉은 기사라더니, 꼭 백사장의 파도를 굳힌 것과 같이 푸르구나. 황제는 황실의 세공사를 불러 루비 대신 그 눈을 쏙 빼닮은 아쿠아마린을 대신 물려 그 손에 쥐여주라고 명한다. 엘로이 슈발리에는 그 몸이 노쇠하여 은퇴할 때까지 그 검과 함께 했고, 후배 기사들은 검에 박힌 푸른 보석을 보면 누구나 존경과 예의를 표했다. 이 명검은 그가 한줌 재로 사라진 뒤에는 저택의 벽에 걸려 가보라는 이름으로 후손들의 원동력이 된다. 검에 경건한 인사를 올리며 이 보석에 엘로이의 혼이 깃들었다고 혹자는 얘기했다.
세 번째 가보인 영지에는 슈발리에 가의 대저택이 위치해있다. 전쟁이 정리되어 갈 즈음 황실은 파이트라 왕국과 인접한 네레 산맥의 끝자락의 광산을 개발하려 인재를 물색하고 있었으나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수많은 학자들의 답사 결과 광산 내부의 매장량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어 막대한 부가 예정되어있는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안정되지 않은 국경선 사이의 문제를 떠안게 될까 1번 후보였던 귀족들이 하나 둘 물러났기 때문이다. 척박한 영지로 이주해 영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버겁지 않을까 얘기하던 이들도 많았다. 이로 한창 골치를 앓다 황실은 그들에게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한 남자, 제국의 검이자 붉은 기사, 슈발리에 백작을 떠올렸다. 군사적인 지도력 하며 사업에 있어서도 청렴할 것이라고-황실이 내려준 땅에서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은 큰 불온임이 분명하기 때문에-확신할 수 있는 탓이었다. 수익을 크게 나눠주는 조건으로 영지를 내리고 사업을 위해 힘쓸 것을 권유받자 단번에 따르겠다고 대답한 그는 아내와 시종들을 데리고 이주해 남은 노년 생활을 그곳에서 보낸다. 수도에 남은 슈발리에 저택은 그의 노쇠한 부모가 마지막으로 맡아 관리하다 생이 끝날 즈음 나라에 기증했다고 한다. 저택은 곧 허물어지고 새로운 공공기관이 세워졌다.
백작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엘로이의 재산이 모자랐던 적은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수여받은 영지를 관리하고 대가 이어질수록 그것은 점점 더 몸을 불려갔고 지금 대-어린 쌍둥이가 있는-에 이르러서는 철광과 은, 그리고 희귀한 보석들에 이르르기까지 많은 광물들을 캐낼 수 있는 대규모 광산이 되었다. 그를 관리하는 가문이 대부호인 것은 수학 공식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영지의 세공업자들은 도매로 은광석과 철광을 사다 들여 귀금속 용으로 세공을 하거나 대장장이 질을 해 갑주를 만들어 제국 곳곳에 납품하고 있으니 이는 결과적으로 예술 문화 발전에도 슈발리에 가가 큰 기여를 한 셈이 되었다.
이렇듯 슈발리에 가는 모든 것이 황실에서 비롯되었으며 가업조차 국가 산업과 연결된 만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있다. 따라 주인 되는 자는 황실의 풍조에 따르는 것이 당연했고 집안 내부에서의 역할 역시 그 풍조에 기반을 둔다. 시대의 큰 흐름을 아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니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크게 구분 짓지는 않으나 적어도 점할 수 있는 위치에는 성별에 따른 한계가 정해져 있다. 가주는 남성이 맡으며 그들은 대대로 기사단에 지원한다. 현 가주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역시 서리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황실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는 파이트라 식민지 전쟁에서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황자를 도왔다. 이런 연유로 가주가 영지의 관리에 온 힘을 기울이기는 어려운 형편이니 대부분 어린 나이에 총명한 상대를 구인해 정략결혼을 거쳐 영주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 자식을 낳을 때에도 무조건 남성이 난 순서에 관계없이 가주 계승의 1순위로 여겨 검술을 연마하게 하고, 여식들은 셈과 정치학, 그리고 외교 등의 행정 임무에 능한 인재로 키워내어 가주가 딱 맞는 신부를 찾을 때까지 모친을 도와 영지 관리를 돕도록 한다.
그러나 몇년 전 관리하는 영지의 광산 두어개가 산사태로 무너져 안에서 일하던 수많은 인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영지의 분위기가 크게 가라앉았으며 광산 사업도 주춤해 크게 적자를 보았다. 금전적 손해는 생활의 규모를 유지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 정도였으나, 황태자를 지지하는 전 영주를 향한 영지민들의 슬픔과 분노 섞인 작은 반발들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가 숨을 거두고 비아트리체 아이텐샤 엘로이 슈발리에가 자취를 감춘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전 가주 빈센트는 칼리아스 황태자를 도와 파이트라 왕국의 견제에 힘쓴 바 있으며 당연하다는 듯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황태자 책봉식을 집의 경사인 것처럼 여겼다. 황제의 선택이 곧 법인 슈발리에에겐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슈발리에의 여식, 새로운 백작의 누이, 스완 유스티체 슈발리에만은 그 뜻을 달리함을 밝혔다. 그리고 현 가주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가 누이의 행보를 탈선이라 여기지 않음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나라의 혼란과 여전한 재해들에 슈발리에의 새 주인들은 보다 영민하게 대처했다.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백작은 훈련소에 지원하길 바라는 영지민을 소집해 이동 기간 동안의 물자와 운송 수단을 지원했으며 영지의 관리자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는 산사태와 그로 인한 광산의 붕괴를 막기 위해 보존 사업에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다. 결과는 훌륭했다. 슈발리에의 새 주인, 새 시대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들은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 의무를 너무나 잘 이행하고 있었다.
또한 슈발리에 백작은 이전 사건의 피해자들을 관대하게 살피고 의식주를 지원하며 달래어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국에 비해 영지의 상황만큼은 많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충분한 보상이 아니라며, 하잘것 없는 동정을 자비처럼 내려주는 태도가 못마땅한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온화하다는 수식어와는 관계 없이 귀족인 그가 평민이나 자유 신민의 잔투정에 귀 기울일 이유는 전혀 없었으므로 무시로 일관했다. 꼭 그의 부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
:: 끊기지 않은 맹약
"너무 늦진 않았을까."
"함께 해줘."
흰 구두굽이 잘 닦인 복도를 작게 두드리며 지나간다. 완벽한 보법 탓에 다소 높은 굽에도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똑, 똑, 똑, 어린 아이의 노크 소리가 이러할까. 숨죽이고 선을 넘어가도 되느냐 중얼거리는 작은 물음과도 같다. 그 발걸음이 멈춰선 곳은 누이의 방 앞이다. 어린 날 이 틈을 들여다보기 위해 수없이 이 복도를 헤매였던 것이 떠오른다. 친숙한 허상을 시야에서 물리며 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서리낀 창가도 이제는 제법 낡아 찬 바람이 새어들어올텐데도, 그는 그 곁의 의자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 고요히 서서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방향을 같이 바라본다. 이젠 닮았다고도 못하겠어, 울리는 작은 말이 있다. 자신과 두 뼘은 차이날 작은 누이가 아직도 낯설다는 것처럼 고개를 조금 기울여 시선을 맞춘다.
"온실을 허물었어. 알고 있었겠지만."
"... ..."
"빈 자리엔 구근을 심었어. 겨울이 지나면 싹이 틀 거야, 그리고 다시 지고... ..."
정말로 그랬다. 한 때 가벼운 검을 쥐고 뛰어다녔던 정원의 좁은 한 켠, 세워져 있던 유리 온실은 거둬지고 정원사들이 갈아놓은 검붉은 흙이 보였다. 지금은 무엇도 보이지 않지만, 그의 말대로 혹한이 지나면 구근은 싹을 틔울 것이다. 봄이 되면 푸르게 피어나 정원사에게 부탁해 마법을 걸어 보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그래, 아름답겠구나. 그렇게 조용히 답했다. 시선은 먼 곳에서 떼지 못했고, 목소리는 학습된 다정함이 묻어났지만 드물게 투명한 진심이 드러난다. 피어날 아마릴리스를 기대하며 누이의 짧아진 흰 머리칼 쪽으로 손을 내어 잠시 끝단을 매만진다.
이러한 기대를 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저 매일 다가오는 하루에 휩쓸리고 닳고 깎여나가며 고통스러워 하느라 너와 나는 서로를 마주할 시간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 의무를 말하는 나는 단단했고, 동시에 어설펐으며 모순투성이인 말들로 분신인 너를 찌르곤 했었지. 뒤늦게 옅은 후회를 한다. 그것조차 틈이라고 배웠기에 드러낼 수는 없었으니 눈만 길게 감았다 뜰 뿐이었다. 우리는 아마도 다시는 같은 길을 걸을 수 없겠지. 어느 날, 서로의 숨통을 끊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시선을 내려 바라본다. 그러나 나는 약속을 잊지 않았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나의 누이, 스완, 너를 애틋하게 여길 것이다. 너는 나의 맹우니까.
눈이 내리는 계절이 끝나간다. 혹한을 견뎌낸 네게 주어진 봄이 다가온다.
바야흐로 너의 시대가, 우리가 만개할 시대가 날아든다.
캐릭터의 장래희망과 지지 후보에 관해 :
칼리아스 황태자를 지지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버지와 엘로이 슈발리에의 의지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치환해 '레이븐' 의 의견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없이 순수하며 맹목적이라 단단합니다. 근거는 정통성 단 하나에 기반해 있습니다.
스완의 탈선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의 정치색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억눌려 자랐던 둘의 괴로웠던 유년시절에 대한 동정과 무게를 짊어진 지금에서야 할 수 있게 된 뒤늦은 이해에 기반한 것입니다. 슈발리에의 절대자로서 내리는 관용에 가까운 것으로 만약 칼을 겨눠야 할 순간이 온다면 마땅히 서로를 전력으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로 가야 할 길이 달라도 그 방향성마저 상대의 일부로 포용하게 될 정도로 시간이 날카로운 부분을 많이 갈아냈습니다.
장래희망은... 기사단에 들어가 황실의 검이 되는 것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황태자 직속의 창공의 기사단에 들어가거나 서리 기사단 소속이 되어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합니다. 기사단장이 되면 좋겠지만... 성적이 따라주지 않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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