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포스팅은 PC 환경에 맞춰 작성한 글입니다. 모바일로 보면 다소 양식이 깨져보일 수 있습니다.)

 

 

 

'컬트 무비' 라는 용어를 창조해낸 대작, 록키 호러 픽쳐 쇼

 

 

  

  

▴영문판 포스터와 재개봉한 한글판 포스터

 

 

 

 

-공식 간략 줄거리-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할 판타스틱 뮤지컬!

상식과 경계를 허무는 환상의 세계!

 

‘브래드’는 약혼녀 ‘자넷’과 둘을 맺어준 은사 스콧박사를 찾아가는 길에 폭우를 만난다. 설상가상으로 자동차 타이어까지 펑크가 나게 되고, 둘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외딴 성의 문을 두드린다. 이 성에는 양성 과학자 ‘프랭크 N 피터 박사’와 기괴한 모습의 꼽추 ‘리프래프’ 등이 살고 있다. ‘브래드’와 ‘자넷’은 이들의 파티에 참석해 상상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밤을 보내게 되는데…

 

지구에서 가장 아찔하고 섹시한 쇼가 시작된다!

 

(출처: 다음 영화 정보)

 

 

 

줄거리만 봐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죠 ㅋㅋㅋㅋ

 

저도 이게 컬트 영화라서 찾아본 게 아니고, 최애 배우 에즈라 밀러가 '월플라워' 에서 토막 연기 했던 파트 보고 관심 가지게 된 다음에 찾아봤는데

 줄거리가 하도 정신없어서 제대로 읽히지도 않았던 기억이 나요. 

 

이 영화는 1973년도에 초연된 '록키 호러 쇼' 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1975년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에요. 

 

저예산 제작 영화인데다, 워낙 난해한 내용이다보니 2주만에 극장에서 내려가고 후에 심야 영화로 변두리 극장에서 근근히 상영되었는데

일부 관객들이 몇 번이고 이 영화를 재관람 하곤 노래를 따라부르기도 하고, 영화 캐릭터 같이 차려입은 뒤 나가서 춤을 추거나 대사에 크게 소리쳐 대답하는 등 열렬한 호응을 보내며, 그게 특별한 관람문화로 정착했다고 해요... 이를 반영해서 지난 10월 작년 한국 재개봉한 상영관에서도 싱어롱으로 상영한 것 같던데, 소심이 미덕인 한국의 정서도 한 몫하긴 했겠지만 관람객 대부분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반응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 들은 바 있네요.

 

결국 뉴욕에서만 13년 연속 상영되었고 뒤늦게나마 엄청나게 성공을 거둔 영화랍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상영 중일거에요.  검색해보니 대구의 작은 소극장에서도 상영해주던데, 서울에는 없을까 생각하며 아쉬워 해봅니다.

 

 

 

 

 

! 스포일러 주의 !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 및 주인공 소개를 서술합니다. 스포 싫으신 분들은 보지 말아주세요.

 

 

 

#1. 첫 번째 노래.

 Damn it Janet

 

 

▴ 행복하게 웃고 있는 랠프, 베티 부부와 그들의 하객들.

 






▴ 베티가 던진 부케를 낚아챈 자넷과 그녀를 바라보는 랠프와 브래드
 

 

 

영화는 브레드와 자넷의 친우 랄프 헵샷과 베티 먼로의 결혼식 장면으로 이야기의 막을 엽니다. 

작은 마을 교회 앞에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새 부부의 화합을 축하해주고 있고, 신랑과 브래드가 잠시 담소를 나누는 사이 여자들은 부케를 던지려고 합니다.

이때 베티가 던진 부케를 자넷이 잡아채는데,  브래드를 툭툭 치며 "다음은 네 차레구나." 하고 농을 건냅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가 신혼 차를 타고 교회를 떠나고 사람들도

그들을 따라 환호를 지르며 발걸음을 옮긴 후 둘만 남았을 때 브래드가 자넷에게 청혼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가 바로 록호픽의 첫 노래, Damn it Janet 입니다. 

 

 

 

 

 

 

 

" 자넷?"

 

"응, 브레드?"

 

" 난... 네가 실력있게 ... 다른 여자들을 제치고 부케를 받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

 

"오... 브레드..." 

 

 

 

 

브래드는 반지를 건네며 자넷에게 청혼을 하고, 자넷은 기뻐하며 수락합니다. 자넷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브래드를 알고, 인사도 마친 상태니 

 같은 강의실에서 만난 둘을 가르치던 교수, 그들의 은사 닥터 스캇을 만나 감사의 인사를 나누려고 둘은 차를 타고 출발합니다.

 

 

 

브래드: Hey, Janet 

(저기, 자넷)

 

자넷:  Yes, Brad?

(응, 브래드?)

 

브래드: I've got something to say

(할 말이 있어.)

 

자넷: Uh huh?

(응?)

 

브래드: I really love the...skillful way

나... 정말 좋았어... 네가 실력있게

You beat the other girls

다른 여자들을 제치고

To the bride's bouquet

부케를 받아낸 것 말야.

 

 

자넷: Oh...oh, Brad

오... 오, 브래드...

 

 

 

브래드: The river was deep but I swam it

과정은 험난했지만, 난 해냈어.

 

코러스: Janet

자넷

 

브래드: The future is ours, so let's plan it

미래는 우리 것이야, 그러니 같이 그려나가자

 

코러스: Janet

자넷

브래드: So please don't tell me to can it

그러니까 제발 그만두라고 하지 마

 

코러스: Janet

자넷

 

브래드: I've one thing to say, and that's

나 할 말이 있어, 그리고 그건...

Dammit Janet, I love you

젠장. 자넷, 당신을 사랑해.

 

The road was long but I ran it

과정은 험난했지만, 난 해냈어.

 

 

코러스: Janet

자넷

 

브래드: There's a fire in my heart and you fan it

당신이 불지른 내 마음이 타오르고 있어

 

코러스: Janet

자넷

 

브래드: If there's one fool for you then I am it

당신만을 위한 바보가 있다면, 그게 바로 나야.

 

코러스: Janet

자넷

 

브래드: I've one thing to say, and that's

나 할 말이 있어, 그리고 그건

Dammit Janet, I love you

젠장. 자넷, 당신을 사랑해.

 

Here's a ring to prove that I'm no joker

여기 내 마음을 증명할 반지가 있어.

 

There's three ways that love can grow

사랑엔 세 가지 종류가 있지

That's good, bad, or mediocre

좋은 것, 나쁜 것, 혹은 그저 그런 것

 

Oh J-A-N-E-T, I love you so

오 자-넷, 당신을 정말 사랑해!

 

 

자넷: Oh, it's nicer than Betty Munroe had

오, 이거 베티 먼로의 반지보다도 좋은 거잖아!

 

코러스: Oh, Brad

오 브래드

 

자넷: Now we're engaged and I'm so glad

우린 이제 약혼했고, 난 너무 기뻐.

 

코러스: Oh, Brad

오 브래드

 

자넷: That you met Mom and you know Dad

우리 엄마는 이미 만났고, 당신은 우리 아빠도 알지.

 

코러스: Oh, Brad

오 브래드

 

자넷: I've one thing to say, and that's

나 할 말이 있어, 그건 바로

Brad, I'm mad, for you too

브래드, 나도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거야.

 

Oh, Brad

오~ 브래드

 

 

브래드: Oh, dammit

오... 젠장.

 

자넷: I'm mad

당신을...

 

브래드: Oh, Janet

오... 자넷...

 

자넷: For you

정말 미치게 사랑해.

 

브래드: I love you too

나도 정말 사랑해.

 

 

브래드, 자넷: There's one thing left to do, ah-hoo

이제 남은 건 한 가지 뿐!

 

브래드: And that's go see the man who began it

그건 바로 우릴 맺어준 분을 뵈러가는 것!

 

코러스: Janet

자넷

 

브래드: When we met in his science exam-it

그분 과학 시험을 보러 간 강의실에서 우리 둘은 만났지

 

코러스: Janet

자넷

 

브래드: Made me give you the eye and then panic

그 분이 아니었더라면 우린 만나지 못했을거야

 

코러스: Janet

자넷

 

브래드: Now I've one thing to say, and that's

나 할 말이 있어, 바로 그건

Dammit Janet, I love you

젠장... 자넷, 사랑해.

 

Dammit, Janet

젠장, 자넷

 

자넷: Oh Brad, I'm mad

오 브래드, 당신에게 미친 것 같아.

 

브래드: Dammit, Janet

젠장.. 자넷.

 

브래드, 자넷: I love you

사랑해

 

 

 

 

# 2. 두 번째 노래. 

Over At The Frankenstein Place

 

 

 

한창 닥터 스캇을 만나려 비를 해치고 가던 두 사람의 차 바퀴가 터지는 것으로 두번째 장면이 시작됩니다.  

스페어 타이어도 없고, 외진 숲 속이라 마땅히 수리할 곳도 보이지 않아 고민하던 둘은 지나오는 길에 본 성을 기억해내곤 

그곳에 수리공을 부를 전화 한 통을 빌리러 차 밖으로 나섭니다. 

 



▴ 성 문 앞에 걸려있는 경고문





 

 

이때 자넷과 브래드가 부르는 노래가 영화의 두 번째 노래 Over At The Frankenstein Place 입니다. 

사실 성에 들어가기 전 까지의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긴 한데 제가 이 두 노래를 너무 좋아해요. 언젠가 뮤지컬로 보는 게 꿈이에요.

 

 

 

In the velvet darkness

벨벳같은 어둠

 

Of the blackest night

그 새까만 밤에

 

Burning bright

저기 한 줄기 타오르는

 

There's a guiding star

 우릴 이끄는 빛이 있네.

 

No matter what or who you are

당신이 누구고, 그 무엇이던 간에

 

 There's a light

한 줄기 빛이 있네,

 

Over at the Frankenstein place

프랑켄슈타인의 저택 너머에.

 

There's a light

한 줄기 빛이 있네,

 

 Burning in the fireplace

타오르는 벽난로 안에.

 

There's a light, light

한 줄기 빛이 있어

 

In the darkness of everybody's life

모든 인생의 어둠 속에...

 

 

 The darkness must go

어둠아 물러가라

 

Down the river of night's dreaming

꿈꾸는 밤의 강물과 함께.

 

Flow Morpheus slow

*모르페우스여, 천천히 흘러라 

 

Let the sun and light come streaming

태양과 빛이 내 삶 속으로 흘러들어오게 하라

 

Into my life, into my life

내 삶 속으로, 내 삶 속으로...

 

 

 There's a light

한 줄기 빛이 있네

 

 Over at the Frankenstein place

프랑켄슈타인의 저택 너머에

 

There's a light

한 줄기 빛이 있네

 

Burning in the fireplace

타오르는 벽난로에

 

There's a light, a light

한 줄기 빛이 있어

 

In the darkness of everybody's life

 

모든 인생의 어둠 속에...

 

 *그리스 신화 속 잠의 신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 도움만 받고 무사히 차로 돌아간다면 영화가 아니겠죠.

 



▴ 의미심장하게 말을 던지는 나레이터의 모습

 

 

 

 

 

# 3. 세 번째 노래. 

The Time warp

 

비에 쫄딱 젖은 자넷과 브레드를 맞아주는 건 저택의 한 사용인.

 







Hello

 

 

 

수상한 모습의 음침한 사용인은 브레드와 자넷이 전화를 빌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모습을 위 아래로 살펴보다가

일단 들어오는 게 좋겠다며 그들을 성 안으로 초대합니다. 

 



 

 

성 안의 모습은 수상한 사용인의 모습 만큼이나 수상합니다...

 

자넷은 결국 뒤에 사용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섭다고 큰 소리로 불평하고

브래드도 마찬가지로 두렵지만 마찬가지로 돈 많은 괴짜들의 별장같다고 애써 납득해보려 합니다.

 

안에서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노랫소리에 자넷은 사용인에게 혹시 파티중이냐고 묻습니다.

 

사용인은 딱 때맞춰 왔다고 말하고, 그 순간 계단에서 음침한 메이드가 계단을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며 부르기 시작하는데

이 노래가 트란실바니안들의 타임 워프입니다.

 

 

 

 

리프래프: It's astounding; Time is fleeting; 

너무 놀라워... 시간은 너무나도 덧없고,

 

Madness takes it's toll.

광기는 날 힘겹게하지.

 

But listen closely... 

그렇지만 잘 들어봐.

 

마젠타: Not for very much longer.

금방 알게 될테니까

 

리프래프: I've got keep control. 

난 통제권을 쥐고 있거든.

 

I remember doing the time-warp.

나는 기억하지 [타임워프]를 할때를

 

Drinking those moments when The blackness would hit me

암흑이 날 후려치던 그 순간을 전부 마셔버리면

 

리프래프, 마젠타: And a void would be calling...

공허가 울부짖겠지.

 

트랜실바니안들: Let's do the time-warp again.

시간을 뒤틀어 버려라

 

Let's do the time-warp again.

[타임 워프]를 하자

 

나레이터: It's just a jump to the left.

왼쪽으로 한발 점프

 

모두: And then a step to the right.

다음엔 오른쪽

 

나레이터: With you're hands on you hips.

양손은 허리에

 

모두: You bring your knees in tight.

무릎을 꽉 붙이고 

 

But it's the pelvic thrust 

엉덩이를 내밀어 

 

That really drives you insane.

그럼 미치게 될거야

 

Let's do the time-warp again. 

시간을 뒤틀어 버려라

 

Let's do the time-warp again.

[타임 워프]를 하자

 

마젠타 :It's so dreamy, oh fantasy free me.

오 너무 황홀해, 환상들은 날 자유롭게 하지.

 

So you can't see me, no, not at all.

당신이 날 볼 수 없게 말이야. 전혀.

 

In another dimension, with voyeuristic intention, 

다른 차원에서 몰래 훔쳐보는것 같은 

 

Well secluded, I see all.

완전한 격리감, 난 전부 지켜보고 있지.

 

리프래프 : With a bit of a mind flip

가슴이 두근 거려.

 

마젠타: You're into the time slip.

시간의 뒤틀림 속에서는

 

리프래프 : And nothing can ever be the same.

모든게 전과는 달라져

 

마젠타 : You're spaced out on sensation.

넌 흥분 때문에 멍해질걸.

 

리프래프 : Like you're under sedation.

마약에 취한 것처럼 말이야!

 

모두 : Let's do the time-warp again.

시간을 뒤틀어 버려라 

 

Let's do the time-warp again.

[타임 워프]를 하자

 

콜럼비아 : Well I was walking down the street just having a think

글쎄, 생각에 잠겨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When this snake of a guy gave me an evil wink.

독사같은 남자가 유혹의 윙크를 하네

 

He shook me up, he took me by surprise

그가 날 동요하게 했어, 놀라움으로 날 매료시켰지

 

He had a pickup truck, and the devil's eyes.

 픽업 트럭과 악마의 눈을 가진 남자.

 

He stared at me and I felt a change.

그는 날 바라봤고, 난 변화를 느꼈어.

 

Time meant nothing, never would again. 

시간은 무의미 하고, 앞으로도 그럴거란걸.

 

모두 : Let's do the time-warp again.

시간을 뒤틀어 버려라

 

Let's do the time-warp again.

[타임 워프]를 하자

 

나레이터 : It's just a jump to the left.

왼쪽으로 한발 점프

 

모두 : And then a step to the right.

다음엔 오른쪽

 

나레이터 : With you're hands on you hips.

양손은 허리에

 

모두 : You bring your knees in tight.

무릎은 꽉 붙이고

 

But it's the pelvic thrust 

엉덩이를 내밀면 

 

That really drives you insane.

미쳐 버릴거야

 

Let's do the time-warp again. 

시간을 뒤틀어 버려라

 

Let's do the time-warp again.

[타임 워프]를 하자

 

 

 

(콜럼비아의 탭댄스)

 

 

Let's do the time-warp again.

시간을 뒤틀어 버려라

 

Let's do the time-warp again.

[타임 워프]를 하자

 

나레이터 : It's just a jump to the left.

왼쪽으로 한발

   

모두 : And then a step to the right.

다음엔 오른쪽

   

나레이터 : With you're hands on you hips.

양손은 허리에

   

모두 : You bring your knees in tight.

무릎은 꽉 붙이고

 

But it's the pelvic thrust

엉덩이를 앞으로 내밀면

 

That really drives you insane.

미쳐 버릴거야

 

Let's do the time-warp again.

시간을 뒤틀어 버려라

 

Let's do the time-warp again.

[타임 워프]를 하자

 

# 4. 네 번째 노래. 

Sweet Transvestite

 

 

 

 

트란실바니안들의 춤을 본 자닛의 반응 ...

 

 

그리고 그녀를 필사적으로 안심시키는 브레드 

 

그러나 그들의 뒤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가 보이시나요

 

범상치 않은 구둣굽

 

결국 자닛은 충격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여자가 쓰러지던 말던 명랑한 저택과 사용인들의 주인, 닥터 프랭크 앤 퍼터의 등장입니다.

 

 

 

 

 

 

 

 

닥터 프랭크 앤 퍼터: How d'you do, I see you've met my faithful handyman

안녕하쇼? 이미 우리 충직한 수리공은 만난 것 같네.

 

He's just a little brought down because when you knocked

당신들이 노크했을 때 약간 실망한 것 같더라고.

 

He thought you were the candyman.

그는 당신들이 마약상인 줄 알았거든.

 

Don't get strung out by the way that I look,

내 생김새에 너무 기죽진 마.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

책을 표지만 보고 판단해서야 쓰겠어?

 

I'm not much of a man by the light of day,

난 낮엔 별 볼일 없는 남자지만,

 

But by night I'm one hell of a lover

밤에는 불같은 연인이 된다고.

 

I'm just a Sweet Transvestite from Transexual, Transylvania.

난 그저 다정한 복장 도착자, 트란실바니아의 트랜스섹슈얼 행성에서 왔지.

 

So let me show you around, maybe play you a sound

당신들에게 이곳을 안내해줄게, 아마 노래를 들을 수도 있겠지.

 

You look like you're both pretty groovy

당신들 둘 다 꽤나 감각 있어보이거든.

 

Or if you want something visual that's not too abysmal

혹시 너무 깊지 않은 영상이 더 끌리면

 

We could take in an old Steve Reeves movie.

오래된 스티브 리브스 영화를 봐도 되겠지.

 

브래드: I'm glad we caught you at home, could we use your phone?

만나서 기쁩니다 ,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We're both in a bit of a hurry.

우리 둘 다 조금 시간이 촉박하거든요.

 

We'll just say where we are, then go back to the car

그냥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만 말하고, 바로 차로 돌아갈겁니다.

 

We don't want to be any worry.

괜히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닥터 프랭크 앤 퍼터:  So you got caught with a flat, well, how about that?

아 그래서, 펑크가 났다 그거지. 

 

Well babies, don't you panic.

자기들, 너무 걱정하지마.

 

By the light of the night when it all seems alright

밤의 빛에 모든 게 괜찮아 보일 때

 

I'll get you a satanic mechanic.

내가 사탄의 기술자를 보내줄테니까 말이야.

 

I'm just a Sweet Transvestite from Transexual, Transylvania.

난 그저 달콤한 복장 도착자, 트란실 바니아의 트랜스섹슈얼 행성에서 왔지.

 

So why don't you stay for the night? Or maybe a bite?

하루 자고가는 건 어때? 아니면, 가벼운 식사라도?

 

I could show you my favourite obsession.

요즘 내가 푹 빠져있는 게 있는데, 보여줄 수도 있어.

 

I've been making a man with blond hair and a tan

그동안 남자를 만들고 있었거든, 금발에 잘 익은 살결의 남자를 말이야.

 

And he's good for relieving my tension

 내 갈증을 적셔줄 수 있는 그런 남자.

 

I'm just a Sweet Transvestite from Transexual, Transylvania.

난 그저 상냥한 복장 도착자, 트란실 바니아의 트랜스섹슈얼 행성에서 왔지.

 

So come up to the lab. And see what's on the slab.

그러니 실험실로 올라와. 그리고 안치대에 뭐가 있는지 직접 보라구.

 

I see you shiver with antici... pation!

기대감에 떨고 있는 것 같네...

 

But maybe the rain isn't really to blame

빗물 탓이라고 해도 소용없어.

 

So I'll remove the cause, but not the symptom.

내가 원인을 제거해줘도, 증상은 그대로일테니까.

 

 

 

 

# 4. 네 번째 노래.

Sword Of Damocles

 

 

제 할말만 하고 휑하니 자신의 랩으로 올라가버린 닥터 프랭크

닥터의 사용인들은 브래드와 자넷의 옷을 홀딱 벗기고 닥터가 말한대로 그들을 앨리베이터에 태워 올려보냅니다.

 

 

 

 

 

닥터에게 명령받는 두 하수인 마젠타와 콜럼비아.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웃고 있는 닥터, 초록색 수술복을 입고 분홍색 고무장갑을 꼈습니다. 

 

 

영광으로 알라며 잘난체 하는 닥터 뒤에선 하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준비되었다고 음습한 얼굴로 알리는 리프래프

 

 

아까 홀에서 열심히 춤추던 트란실바니안들도 2층에서 열심히 바라보고 있다.

 

 

 

 

 

 

 

일단 뭔가 과학적인걸 해야할 것 같으니 동력을 올려봅니다

 

 

 

행복한 박사

 

 

여러가지 물감을 잘 섞어주니 뼈의 실루엣이 드러납니다.

 

집중하는 마젠타. 

그리고 드디어 깨어난 닥터의 역작 

 

 

 

금발의 탄 피부, 근육질의 미남인 록키의 탄생입니다.

 

 

 

 

 

 

 

The sword of Damocles is hanging over my head

데모클라스의 칼이 내 머리 위에 번뜩이네

And I've got the feeling someone's gonna be cutting the thread

금새라도 누군가 그 실을 끊어버릴 것만 같구나.

Oh, woe is me, my life is a misery

오, 저주받은 나, 내 삶은 비참해

Oh, can't you see that I'm at the start of a pretty big downer?

오, 새 삶을 시작하는 축복의 순간에 저주받은 나

I woke up this morning with a start when I fell out of bed

오늘 아침 새 시작과 함께 난 침대에서 일어났어.

And left from my dreaming was a feeling of unnameable dread

 꿈에서 깨어나며 난 명명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지.

My high is low, I'm dressed up with no place to go

내 꿈은 절망, 난 잘 차려입어도 갈 곳이 없네.

And all I know, is I'm at the start of a pretty big downer...

내가 아는 건 태어날 때부터 내 삶이 절망이었다는 것.

Sha-la-la-la that ain't no crime

샤라라라 그건 죄가 아냐

That ain't no crime

그건 네 죄가 아냐

Rocky Horror you need peace of mind

록키 호러 넌 좀 가라앉을 필요가 있어.

And I want to tell you that you're doing just fine

네게 말해줄게,  넌 이미 잘 하고 있어.

You're the product of another time

넌 또 다른 시간의 작품이야.

And feeling down, well that's no crime...

그리고 우울해지는 건... 뭐, 그건 죄가 아냐.

 

The sword of Damocles is hanging over my head

데모클라스의 칼이 내 머리 위에 번뜩이네

And I've got the feeling someone's gonna be cutting the thread

금새라도 누군가 그 실을 끊어버릴 것만 같구나. 

Oh, woe is me, my life is a mystery

오, 저주받은 나, 내 삶은 수수께끼야.

Oh, can't you see that I'm at the start of a pretty big downer?

오, 새 삶을 시작하는 축복의 순간에 저주받은 나

Sha-la-la-la that ain't no crime

샤라라라라 그건 죄가 아냐

That ain't no crime

그건 네 죄가 아냐 

 

 

 

 

 # 5. 다섯 번째 노래.

I Can Make You A Man

 

 

 

 

태어나자마자 자기 삶은 불행투성이라고 찡찡대는 록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박사

 

 

 

그러나 그는 얼빠이기 때문에 록키의 복근을 보고 뿅가 그만 야단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런 박사가 생일 선물이라며 뭔갈 꺼내오며 이어지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I can make you a man 입니다.

 

 

 

 

 

 

 

A weakling weighing ninety-eight pounds

45키로 나가는, 나약한 남자

Will get sand in his face

걷어차여 나자빠질 때

When kicked to the ground

얼굴이 흙범벅이 될게 분명하지.

 

And soon in the gym

곧 결연한 다짐을 가지고

With a determined chin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할거야.

The sweat from his pores

목표를 가지고 운동할 때마다 

As he works for his cause

땀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땀방울들

 

Will make him glisten

그게 그를 빛나게 하겠지.

And gleam, and with massage

번뜩이게 할거야, 마사지와

And just a little bit of steam

적당한 조금의 습기로 말이야.

 

He'll be pink and quite clean

혈색이 좋아지고, 꽤 훌륭해질거야.

He'll be a strong man

튼튼한 남자가 되겠지.

 

 

Oh, honey!

오 자기야!

 

He'll eat nutritious, high protein

고단백질의 영앙가 있는 음식 먹고, 

And swallow raw eggs

생계란도 삼키고

Try to build up his shoulders

어깨가 떡 벌어지게 운동하겠지

His chest, arms, and legs

가슴이나, 팔, 다리는 말할 필요도 없고.

 

 Such an effort

노력도 가상하지

If he only knew of my plan

내 계획에 대해 전해듣기만 했어도 좋았을걸.

 

In just seven days

앞으로 1주일 안에 나는

I can make you a man

진정한 남자로 만들어줄 수 있어

 

He'll do press-ups and chin-ups

팔굽혀 펴기도 하고, 턱걸이도 해야지.

Do the snatch, clean, and jerk

*역도도 하고 말이야 

He thinks dynamic tension

역동적인 긴장감을 느낄거야.

Must be hard work

꽤 힘든 일이지.

 

Such strenuous living

이렇게 분투하는 삶이란

I just don't understand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When in just seven days

불과 1주일 안에 나는Oh, baby

오 , 자기야

I can make you a man

난 널 진정한 남자로 만들어줄 수 있어

 

 

* snatch, clean and jerk 전부 역도 용어임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샤멜] 온천역극 백업  (0) 2019.07.02
[봄부케]피드백용  (0) 2019.05.06
레이카시 관통후기[미완]  (0) 2019.05.01
레이카시 디엠 아카이브  (0) 2019.05.01
오비츠 자랑  (0) 2019.03.21



이어그려야 하는데 말이에요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샤멜] 온천역극 백업  (0) 2019.07.02
록키 호러 픽쳐 쇼 1.  (0) 2019.05.11
[봄부케]피드백용  (0) 2019.05.06
레이카시 디엠 아카이브  (0) 2019.05.01
오비츠 자랑  (0) 2019.03.21

 

 

“ 스완, 내 넥타이 언제 돌려줘? 곧 입학식인데... ”

 

 

 

 

 

 

Raven Ermesinde Elroy Chevalier

이름 :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나이 : 만 11세

성별 : 남성

학부 : 기사학부

 

 

 

140cm / 덜 붙은 근육.

 

흰 머리 푸른 눈을 살짝 덮는다, 뒷머리도 덩달아 자라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 그래, 달의 마지막 주가 다가오고 있다. 이 작은 소년도 곧 머리를 다듬을 때가 되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시종들이 향유로 정성스레 가꾼 것이라 태양 아래에서는 은은한 빛을 발한다. 시종 장이 직접 빗과 가위를 들고 그 머리카락을 다듬어 손질해준다. 손질을 미뤘다가는 금세 찌르는 머리카락에 눈물이 나곤 해 그 주엔 소년은 더 유순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은 보통 속상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꼬리가 처져있으나 환히 웃음 짓는 레이븐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그가 시무룩한 소년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의 인상은 전체적으로 밝다. 햇살같이 밝은 아이라기보다는 설원에 비친 햇빛같이 밝았다.

발그레한 뺨에 홍조 있는 얼굴은 건강해 보인다. 입술은 꾹 다물린 채 의미 없이 열리는 법이 없다. 습관을 쉽게 고칠 순 없는지 입술은 조금씩 물어뜯어 종종 부어있다. 왼쪽 눈 아래로 눈물점이 두 개 자리하고 있다. 귀는 뚫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신경 쓰고 있는 곳 중 하나다. 옷 하나를 갈아입을 때도 시종들이 귓가를 건드리면 한껏 아픈 표정을 지어 애먹이곤 한다. 귀걸이는 아쿠아마린이 세팅된 것으로 보통 신는 신발의 고정핀에 세팅된 것과 같다.

 

표정은 담담한 편이지만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울상이 되어버린다. 이 표정에는 당해내는 사람이 좀처럼 없어 슈발리에 가의 사용인들은 이어지는 레이븐의 희미한 미소에 깜빡 넘어가곤 한다. 손도 대부분 뒷짐을 지고 있지만, 그 등 뒤에 감춰진 손은 땀에 살짝 젖은 채로 서로를 꽉 붙잡고 있다. 말랑말랑한 뺨과 근육이 덜 붙은 종아리와 다르게 손바닥엔 흰 굳은살들이 옅게 자리하고 있다. 꽉 쥐면 그 나이대 소년이 지녀야 할 부드러움이 없어 당황하게 되는 정도로, 손이 예쁘지 못하다는 말을 종종 어머니께 들어 악수를 꺼린다.

옷은 시종들의 손에 의해 반듯하게 풀 먹인 채 단정하게 입혀져 있다. 저녁쯤 되면 스완과 함께 뛰어놀기 때문에 마구 구겨진 채로 돌아온다. 교복의 카라에 엉성히 묶여 있는 리본은 레이븐의 쌍둥이 누나, 스완이 묶어준 것.

 

 

 


성격

 조심스러움 / 이타적임 / 순종적 태도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은 버릇없이 자란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이는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타고난 천성이 조심스럽다. 글을 한 줄 쓰고 나서도 잉크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고 다음 줄을 작성했다. 가정교사들은 덜 떨어졌다거나, 소심하다는 단어를 붙이는 대신 아이가 신중한 성격이라고 부모에게 설명했다. 무엇 하나를 시작하면 끝까지 실수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며 가르친 성실하고 사려 깊은 선생님들의 덕에 아이는 주변을 살피는 일에 능숙해졌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과 어조로 기분을 읽는 일은 본능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금방 눈치채지만 물론 그에 응할 것인지는 소년이 결정해왔다. 사실 비위를 맞추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종과 그 주인의 일의 경계 또한 레이븐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신분 덕에 당연하게도 시종들에게 시중받는 일에 익숙하다. 아이는 누구에게나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나 본인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나누도록 배웠다. 직접 떨어뜨린 것을 줍거나, 옷을 풀어헤치거나, 젖은 흙 위를 뛰어다니지 않으며, 춤추거나, 노래하는 등의 사교계 유희에는 낯설어하는 반면, 무술이나 교양 등 부모가 권장하는 과목들에 임할 때는 열성적으로 임했다. 아이가 행위의 귀천을 가려 그렇게 행동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배우고 들은 대로 반복할 뿐이라서, 레이븐이 현재 규정하고 있는 선과 악, 필요와 불필요의 잣대는 순수하게 타인의 잣대로만 재단된다. 레이븐은 그의 유모에겐 더없이 살갑고 예의 바른 아이였으며, 저택의 요리사에게는 사랑스러운 작은 쿠키 도둑이었고, 예절을 가르치는 시종 장에게는 훌륭한 학생으로서 이타적이라는 말을 감히 덧붙여도 될 만큼 최대의 선의로 임했다.

아직 어린 나이가 한몫할 테지만 한 번 신뢰한 사람이 내리는 지시에는 좀처럼 의문점을 품지 않는다. 호불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어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투명한 순박함 덕에 그러하다. 특히 혈육에게 품은 애정이 깊어 부모와 쌍둥이 누나의 말이라면 대부분 그대로 믿어버리곤 한다. 그게 설령 어설픈 거짓말일지라도.

 

 


기타   

파도스의 24일에 탄생.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현 가주 및 서리 기사단 소속 기사

비아트리스 아이텐샤 엘로이 슈발리에, 영주 대리인 및 저택의 제 1 권력자

 

 작은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다. 흰 토끼, 이름은 아델레이드. 아카데미에 오기 위해 두고 오며 앞발을 놓지 못해 한 시간 동안 집사와 실랑이를 벌이며 작별인사를 했다. 아델레이드가 태어난 지 1달 후 침대 위에서 발견한 어금니 유치를 부적처럼 작은 주머니에 넣어 챙겨왔다.

 

손의 거스러미를 뜯는 버릇이 있다. 아플 만도 한데 상처가 난 손의 딱지를 계속 만지작거려 흉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이에 대해 몇 번이고 꾸중을 들었으나 잘 고쳐지지 않았다. 손바닥이 예쁘지 않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서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꽉 쥐어 보이지 않게 한다. 손에 난 상처들은 검술 수련으로 생긴 것들이다. 목검을 쥐는 자세가 이상해 초반에 자주 손바닥이 짓무르고 물집이 생겼다.

 

귀는 뚫은 지 이제 한 달이 막 지나 덜 아문 상태라 만지면 아파한다.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자꾸 만지작거려서 큰일이라며 몇 번이고 손등을 얻어맞았다. 그 외의 액세서리로는 9살 생일에 선물 받은 작은 금반지가 있으나 푸른 실에 묶어 아델레이드의 목에 걸어주고 왔다. 토끼의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시종 장의 말에 스완과 레이븐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걸어준 것이다. 저택을 떠난 후 시종 장이 수거해 보석함에 보관하고 있다.

 

부모와의 사이가 특별히 각별하다. 부모 나이 각각 22세, 19세 되던 해에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이후 20년 만에 맞은 늦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노산인 탓에 가문의 사람들은 임신 기간 내내 걸음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다녔다고 자주 농담한다. 가족끼리의 애칭은 나의 아쿠아마린. 결혼 20주년의 선물로 자주 선물 되곤 하는 각별한 보석.

 

무서운 이야기를 듣거나 깜짝 놀란 날에는 꼭 밤에 악몽을 꾼다. 레이븐을 위해 방 한 곁에 유모의 방을 증축하는 공사마저 있었을 정도다. 아카데미에서는 혼자 자야 하는지 하루에 몇 번이고 어머니에게 여쭤보다가 씩씩한 기사가 되려면 혼자 잘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에 최근엔 조금 더 표정이 비장해졌다.

 

스완이 교복의 넥타이를 빌려 갔다고 믿고 있다. 아무것도 매지 않을 수 없어 일단 스완의 리본을 매긴 했지만…. 돌려받을 수 있을까? 리본은 묶는 법도 모르는데!

 


 

 

 

슈발리에 백작 가 家

 

전쟁 영웅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후손들

 

 

 

 

슈발리에 백작의 성에는 세 가지 가보가 있는데, 하나는 북 쪽의 벽에 걸린 피투성이 수급의 머리칼을 들어올린 채로 정면을 주시하는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초상으로 가주의 서재 를 열면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걸려있다. 수급에서 흐르는 핏물의 묘사가 끔찍해보여도 이 초상이 흉물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선조, 엘로이 슈발리에의 경건한 표정 탓이다. 

 

작고 큰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던 혼란스러운 정복전쟁의 시기에 기사의 명예와 귀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슈발리에 백작가의 적자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는 황실의 검이 되고자 했다. 많은 검이 부러지고 무뎌졌으며 이가 나간 검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날을 갈 수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끝없이 연마했으나 필멸자들은 어디에서든 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만큼 대담한 사내였으며 운명에 순응할 생각보다는 그것을 도발하며 한계를 시험하는 기사였다. 어느 날, 긴 원정으로 지친 기사단들이 막사에서 잠을 청하는 중에도 그는 깨어 불가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고이는 땀방울을 닦아내려 고개를 들다 희미하게 먼 곳에서 불씨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적이 피운 주둔지의 불임을 직감했다.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는 뛰어난 기사는 아니었다. 그 실력으로만 보자면 평범한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다만 그는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의 원동력은 절대적인 황실에 대한 복종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이는 개인의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순수하고 절대적인 힘이 되어주었다. 어두운 밤에 저렇게 큰 불을 피운다는 것은 기사단이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고백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방어태세또한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음이 자명했다. 아마도 이 근처로 지나가리라는 소식을 듣고 매복을 위해 진을 친 듯 한데, 이렇게 허술해서야. 그는 곧바로 칼을 들고 기사단장에게 달려가 자신의 충직한 다섯 맹우들과 함께 선발대에 설 수 있기를 간청한다. 깊은 밤 기사단의 기사들은 조용히 칼을 갈았다. 여섯 기사들의 뒤를 따라 적의 목을 베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그는 결국 그의 검으로 적장의 목을 베는데 성공한다.  다섯 맹우들의 호위와 지원군 덕분에 큰 피해없이 방심한 매복군의 완전 제압에 성공하였고 이 사건으로 원정으로 지친 제국군의 사기까지 크게 올라가 그 후에 임한 전쟁에 있어서도 대승을 거뒀다. 영토를 늘리는데 있어 큰 공을 세운 뒤 적장의 목을 베어온 붉은 기사 슈발리에의 이야기는 천천히 수도까지 퍼져나간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소식을 듣고 황제는 그 공을 기념하기 위해 붉은 기사를 위한 루비를 박은 명검을 하나 준비한다.  그러나 왕의 기사, 영원한 충신인 그는 바다와 같은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설원과 같이 흰 머리칼과 붉은 뺨을 가지고 있었다. 붉은 기사라더니, 꼭 백사장의 파도를 굳힌 것과 같이 푸르구나. 황제는 보석 세공사를 불러 루비 대신 그를 닮은 아쿠아마린을 다신 물려 그 손에 쥐여주라고 명한다. 그리고 엘로이 슈발리에는 그 몸이 노쇠하여 은퇴할 때까지 그 검과 함께 했고, 뭇 기사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두번째 가보가 바로 그 명검이다. 엘로이 피델리 슈발리에의 손에 딱 맞았다는 긴 장검의 날이 시작되는 곳에는 물방울 모양으로 커팅된 아쿠아마린이 물려져있다. 황제가 감명깊게 보았다던 그 바닷빛 눈은 빛 바라지 않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그것을 지금 바라보고 있는 레이븐의 눈에도 투명하게 비치고 있다. 이 검은 저택의 가장 넓은 방인 식사를 위한 홀의 벽에 걸려져 있고, 그 주위를 투명하고 담백한 보석으로 장식해 허영된 모습으로 보이지 않게 꾸며두었다.  저 명검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명검의 주인인 그의 충성심을 기념하기 위해, 엘로이 슈발리에가 숨을 거둔 뒤부터 그의 후손들은 꼭 아쿠아마린이 물려진 귀금속들을 착용하고 세례명 뒤에 엘로이의 이름을 넣기 시작했다.

 

슈발리에 가의 세번째 가보는 대저택이 위치한 영지 그 자체이다.  정복 전쟁이 정리되어 갈 즈음 파이트라 왕국과 인접한 네레 산맥의 끝자락의 광산을 개발하려 황실은 인재를 물색하고 있었으나, 그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매장량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어 분명히 막대한 부를 불러올 수 있는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안정되지 않은 국경선 사이의 문제를 떠안게 될 것이 뻔해 골치를 앓을 것이라며 귀족들도 하나 둘 물러나던 상황이었다.  척박한 영지로 이주해 영주의 의무를 다하는 일을 버거워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로 한창 골치를 앓다 황실은 적임자를 하나 떠올리게 된다. 황실의 명령이라면 이견없이 수행하고, 성실히 임하는 제국의 검인 슈발리에 백작이라면 군사적인 지도력은 의심할 바 없고, 사업에 있어서도 청렴히 본인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리라 확신할 수 있는 탓이었다. 수익을 크게 나눠주는 조건으로 영지를 내리고 사업을 위해 힘쓸 것을 권유받자 단번에 뜻에 따르겠다고 대답한 그는 노쇠한 부모는 수도의 저택에 머무르게 하고 아내와 영지로 이주해 남은 노년 생활을 그곳에서 보낸다. 

 

백작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엘로이의 재산이 모자랐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나, 수여받은 영지를 관리하고 대가 이어질 수록 그 재산은 점점 더 몸을 불려갔고 지금 대에 이르러서는 철광과 은, 그리고 보석에 이르르기까지 많은 광물들을 캐낼 수 있는 대규모 광산을 관리하는 대부호 가문이 되었다. 영지의 세공업자들은 가문을 통해 도매로 은광석과 철광을 사다들여 귀금속 용으로 세공을 하거나 대장장이 질을 해 갑주를 만들어 제국 곳곳에 납품하게 되니 이는 결과적으로  예술 문화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셈이 되었다. 

 

슈발리에 가는, 가업이 국가 산업과 연결된 만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있다.  따라 그 주인 되는 황실의 풍조에 따라 가주가 정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크게 구분하는 편은 아니나, 적어도 가문 내에서 남성과 여성이 점할 수 있는 위치에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  남성은 가주가 되어 대대로 기사단에 지원했으며, 현 가주 또한 서리 기사단에 소속되어 항상 황실의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가주가 영지의 관리에 온 힘을 기울이기는 어려운 편이라 보통 어린 나이에 총명한 상대를 구인해 정략 결혼을 거쳐 영주의 의무를 다하게 하는 편이다. 자식을 낳을 때에도 무조건 남성이 난 순서에 관계 없이 가주 계승의 1순위로 여겨져 검술을 연마하게 하고, 여식들은 셈과 정치학, 그리고 외교 등의 행정 임무에 능한 인재로 키워낸다. 

 

가문의 정치색은 중립에 가까운 왕당파로, 현재 칼리아스 1 황자의 정통성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는 가문 중 하나이지만,  그 지지와는 관계 없이 황제의 선택에 수긍할 수 있다는 입장도 유지하고 있다. 

 

파이트라 식민지 전쟁에서도 현 가주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가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황자를 도왔으며, 그 견제와 방어에 열의를 다하며 황실을 섬기고 있다.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

:: 소중한 반쪽

 

슈발리에 가의 가주들의 삶은 모두 그 숨이 다하기 전 본인이 특별히 지명하여 고용한 서기에 의하여 한 권의 책으로 집필되어 저택의 특별 서재에 보관된다. 넓은 책장이 꽉 찰 정도로 그 이름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방대한 양이 되었으나 스완과 레이븐이 관심있게 읽은 책은 한 권 이었으니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삶이 기록된 제 13권이었다. 서재의 어두운 양탄자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린채로 밀려오는 이야기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닳도록 읽었고, 꼭 엘로이같은 어른이 되자며 더듬더듬 어린 나이에도 굳은 약속을 했다. 아직도 약속은 유효하다. 얼마나 더 자라던 레이븐은 이 약속을 잊지 못할 것이다.

오랜 가풍의 영향 탓이라 상냥하고 다정한 부모인 빈센트와 비체도 자식들이 정해진 진로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려는 기미를 보이면 엄격한 어조로 다그쳐왔다. 그 전까지는 모호하게 검을 쥐지 못하는 이유를 얼버무리다, 결정적으로 레이븐이 사용하는 훈련용 목검을 몰래 여분까지 하나 더 가져와 스완과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날 그것을 명확히 했다. 그 날 혼난 아이는 스완 뿐이었다. 쥐고 있던 목검도 빼앗기고 홑통을 듣는 스완을 두고, 어머니 비체의 손에 이끌려 다른 방에 억지로 앉아있어야 했던 레이븐은 목소리가 잦아들자마자 뛰어가 스완을 안고 연신 사과하며 위로했지만 둘은 한참을 침묵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만 했다.

여전히 스완은 레이븐의 소중한 반쪽이자 기사이기를 약속한 미래의 맹우다. 스완의 태도가 전과는 달리 약간 차갑게 느껴지는 건 물론 기분 탓이겠지. 스완은 레이븐의 리본도 묶어주는 상냥한 누나인걸.

학교에 가면 부모님의 눈치같은 건 보지 않고 대련할 수 있지 않을까? 레이븐은 목검을 쥐고 서서 스완의 방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BGM

“ 순종은 기사의 미덕... ”

 

 

 

 

 

 

Raven Ermesinde Elroy Chevalier

이름 :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나이 : 만 14세

성별 : 남성

학부 : 기사학부-검술과

 

 

 

 

167cm / 탄탄히 잡힌 마른 근육

 

흰 머리 푸른 눈을 살짝 덮는다, 뒷 머리는 줄곧 길러 이제는 어깨를 살짝 덮어내릴 정도로 자라있었다. 앞머리의 정돈은 여전히 집사가 도와준다. 머리를 짧게 칠 생각은 없는지, 요새는 자주 분홍색 리본으로 묶고 다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시종들이 향유로 정성스레 가꾼 것이라 태양 아래에서는 은은한 빛을 발한다.  팔 다리도 빨리 자라 아주 큰 편은 아니어도 키가 훌쩍 컸다. 그럼에도 특유의 울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어린 아이같은 울상이라기보다는, 이제는 그저 침울함에 가까운 감정이 인상을 사로잡고 있다. 

발그레한 뺨에 홍조 있는 얼굴은 건강해 보인다. 입술은 꾹 다물린 채 쉬이 열리지 않는다. 긴장이 풀어지면 해맑게 말을 쏟아내던 몇 년 전과 달리 이제는 말 수도 한없이 줄어들고야 말았다.  옛 습관을 쉽게 고칠 순 없는지 입술은 조금씩 물어뜯어 종종 부어있다. 왼쪽 눈 아래로 눈물점이 두 개 자리하고 있다. 귀는 완전히 아물었으나 그 과정이 험난해 구멍 근처에 흉이 남았다. 알이 큰 귀걸이를 착용해 그것을 가리는 편이다. 이젠 장신구에도 취향이 생겨 자주 바꿔 착용하는 듯.

 

표정이 조금은 늠름해졌다. 그래도 역시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버린다. 옛 적에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웃음이 낯설어 무표정을 주로 고수하는 편. 나이가 들며 좀 더 엄격히 배우게 된 예절과 자리에 걸맞는 태도의 탓도 있을테다. 손은 대부분 뒷짐을 지고 있다. 그 손을 꽉 맞잡는 일은 여전하나 긴장으로 젖은 손을 보일 순 없는 일이기에 흰 장갑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옷은 시종들의 손에 의해 반듯하게 풀 먹인 채 단정하게 입혀져 있다. 이제는 리본 정도는 혼자 맬 수 있다는 모양.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면 종아리까지 오는 긴 장화의 끈을 꿰는 일이라고나 할까...

 

 

 


성격

 조심스러움 / 이타적임 / 순종적 태도

걸맞는 아들이 되기 위해.

 

타고난 천성이 조심스럽다. 글을 한 줄 쓰고 나서도 잉크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고 다음 줄을 작성했다. 무엇 하나를 시작하면 끝까지 실수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며 가르친 성실하고 사려 깊은 선생님들의 덕에 아이는 주변을 살피는 일에 능숙해졌다. 사소한 일에는 다소 충동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으나, 배운 바에 어긋난다면 이러한 성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생각해보면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과 어조로 기분을 읽는 일은 본능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금방 눈치채지만 물론 그에 응할 것인지는 그가 결정해왔다. 여전히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종과 그 주인의 일의 경계 또한 레이븐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신분 덕에 당연하게도 시종들에게 시중받는 일에 익숙하다. 아이는 누구에게나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나 본인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나누도록 배웠다. 직접 떨어뜨린 것을 줍거나, 옷을 풀어헤치거나, 젖은 흙 위를 뛰어다니지 않고, 무술이나 교양 등 부모가 권장하는 과목들에 임할 때는 열성적으로 임했다. 사교계의 유희에는 조금 익숙해졌다. 춤을 추는 법을 제대로 익혀 이제는 완벽히 사라방드와 미뉴에트를 출 수 있게 되었다. 방학 때마다 틈틈히 익힌 듯 한데... 첫 교정 때 스탭이 완전히 일그러졌다며 많이 혼이 났다. 학교에서 춤을 익힐 시간은 없었다고 열심히 변명한 덕에 어떻게든 넘어간 모양이다.

여전히 신뢰한 사람이 내리는 지시에는 무조건 따른다. 호불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어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때문에 그러하다.  혈육에게 품은 애정이 깊어 부모와 쌍둥이 누나의 말이라면 순종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기타   

파도스의 24일에 탄생.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현 가주 및 서리 기사단 소속 기사

비아트리스 아이텐샤 엘로이 슈발리에, 영주 대리인 및 저택의 관리자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다. 흰 토끼, 이름은 아델레이드. 이제는 나이가 제법 들어 하루 종일 잠을 자는 게 유일한 일과다. 그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요새 레이븐은 많이 심란한 상태. 좋아하는 음식을 알았다. 작은 샐러리를 먹을 때만은 눈을 맑게 뜬다는 게 레이븐의 주장. 유치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세공 장인에게 부탁해 그것을 목걸이 펜던트로 만들어 백금을 두드려 만든 줄에 꿰어 옷 안에 착용했다.

 

손의 거스러미를 뜯는 버릇이 있다. 아플 만도 한데 상처가 난 손의 딱지를 계속 만지작거려 흉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에 대해 몇 번이고 꾸중을 들었으나 잘 고쳐지지 않았다. 손바닥이 예쁘지 않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서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꽉 쥐어 보이지 않게 한다. 손에 난 상처들은 검술 수련으로 생긴 것들이다. 

 

귀걸이를 수집한다.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알이 큰 귀걸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쿠아마린만을 착용하는 것은 여전하다. 길게 늘어지는 것들은 몸을 쓸 일이 없는 날에 착용하고, 귀에 딱 붙는 작은 것들은 잠을 잘 때나 대련 때 착용한다. 그 외의 액세서리로는 13살 생일에 선물받은 검지에 들어갈 정도로 두꺼운 밀랍 인장용 반지가 있다. 가문 문양이 새겨져 있어 편지를 봉할 때 주로 사용하고, 다른 문구들과 같이 보관한다. 무거워서 착용은 거의 하지 않는다.

 

부모와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 부모 나이 각각 22세, 19세 되던 해에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이후 20년 만에 맞은 늦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노산인 탓에 가문의 사람들은 임신 기간 내내 걸음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다녔다고 자주 농담한다. 가족끼리의 애칭은 나의 아쿠아마린. 결혼 20주년의 선물로 자주 선물 되곤 하는 각별한 보석. 이제는 조금 낯 간지러운지 레이븐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지만 어머니는 그만두지 않았다. 나이가 들 수록 엄격해지는 부모님의 태도 탓에 전처럼 어리광을 부리지는 못한다.

 

밤에 악몽을 꾼다. 어린 레이븐을 위해 방 한 곁에 유모의 방을 증축하는 공사마저 있었을 정도다. 아카데미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매일 밤 듣던 무서운 이야기들 덕에 초반 1년은 잠을 거의 설쳤다고... 2년 차에 괜찮아지나 싶다가 최근 다른 이유로 쉬이 잠들지 못한다.

 

자신의 검이 생겼다. 여전히 사용하기에는 버겁지만 듀오로 진급하게 되면서 훌륭한 기사가 되라는 뜻으로 엘로이의 명검을 닮은 모양으로 보석을 물린 검을 받았다. 흰 검집에 레이븐의 풀 네임이 새겨져 있다. 안의 날에도 '걸맞는 자만이 이 자루를 쥐도록 하라.' 하고 유려한 글귀가 각인되어 있다. 아카데미에는 들고오지 않았고, 레이븐도 아직까지 사용해본 적이 없다. 자란 키에 맞게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성인이 사용하기에는 조금 짧은 감이 있다.

 

부모님이 약혼자를 구인 중이다. 현 가주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레이븐이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불분명한 모양. 약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있었으나 코 앞에 다가오자 당황스러워하는 중이다. 내색은 하지 않는다.

 

 

 


 

 

 

슈발리에 백작 가 家

 

전쟁 영웅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후손들

 

 

 

 

슈발리에 백작의 성에는 세 가지 가보가 있는데, 하나는 북 쪽의 벽에 걸린 피투성이 수급의 머리칼을 들어올린 채로 정면을 주시하는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초상으로 가주의 서재 를 열면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걸려있다. 수급에서 흐르는 핏물의 묘사가 끔찍해보여도 이 초상이 흉물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선조, 엘로이 슈발리에의 경건한 표정 탓이다. 

 

작고 큰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던 혼란스러운 정복전쟁의 시기에 기사의 명예와 귀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슈발리에 백작가의 적자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는 황실의 검이 되고자 했다. 많은 검이 부러지고 무뎌졌으며 이가 나간 검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날을 갈 수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끝없이 연마했으나 필멸자들은 어디에서든 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만큼 대담한 사내였으며 운명에 순응할 생각보다는 그것을 도발하며 한계를 시험하는 기사였다. 어느 날, 긴 원정으로 지친 기사단들이 막사에서 잠을 청하는 중에도 그는 깨어 불가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고이는 땀방울을 닦아내려 고개를 들다 희미하게 먼 곳에서 불씨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적이 피운 주둔지의 불임을 직감했다.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는 뛰어난 기사는 아니었다. 그 실력으로만 보자면 평범한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다만 그는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의 원동력은 절대적인 황실에 대한 복종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이는 개인의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순수하고 절대적인 힘이 되어주었다. 어두운 밤에 저렇게 큰 불을 피운다는 것은 기사단이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고백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방어태세또한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음이 자명했다. 아마도 이 근처로 지나가리라는 소식을 듣고 매복을 위해 진을 친 듯 한데, 이렇게 허술해서야. 그는 곧바로 칼을 들고 기사단장에게 달려가 자신의 충직한 다섯 맹우들과 함께 선발대에 설 수 있기를 간청한다. 깊은 밤 기사단의 기사들은 조용히 칼을 갈았다. 여섯 기사들의 뒤를 따라 적의 목을 베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그는 결국 그의 검으로 적장의 목을 베는데 성공한다.  다섯 맹우들의 호위와 지원군 덕분에 큰 피해없이 방심한 매복군의 완전 제압에 성공하였고 이 사건으로 원정으로 지친 제국군의 사기까지 크게 올라가 그 후에 임한 전쟁에 있어서도 대승을 거뒀다. 영토를 늘리는데 있어 큰 공을 세운 뒤 적장의 목을 베어온 붉은 기사 슈발리에의 이야기는 천천히 수도까지 퍼져나간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소식을 듣고 황제는 그 공을 기념하기 위해 붉은 기사를 위한 루비를 박은 명검을 하나 준비한다.  그러나 왕의 기사, 영원한 충신인 그는 바다와 같은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설원과 같이 흰 머리칼과 붉은 뺨을 가지고 있었다. 붉은 기사라더니, 꼭 백사장의 파도를 굳힌 것과 같이 푸르구나. 황제는 보석 세공사를 불러 루비 대신 그를 닮은 아쿠아마린을 다신 물려 그 손에 쥐여주라고 명한다. 그리고 엘로이 슈발리에는 그 몸이 노쇠하여 은퇴할 때까지 그 검과 함께 했고, 뭇 기사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두번째 가보가 바로 그 명검이다. 엘로이 피델리 슈발리에의 손에 딱 맞았다는 긴 장검의 날이 시작되는 곳에는 물방울 모양으로 커팅된 아쿠아마린이 물려져있다. 황제가 감명깊게 보았다던 그 바닷빛 눈은 빛 바라지 않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그것을 지금 바라보고 있는 레이븐의 눈에도 투명하게 비치고 있다. 이 검은 저택의 가장 넓은 방인 식사를 위한 홀의 벽에 걸려져 있고, 그 주위를 투명하고 담백한 보석으로 장식해 허영된 모습으로 보이지 않게 꾸며두었다.  저 명검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명검의 주인인 그의 충성심을 기념하기 위해, 엘로이 슈발리에가 숨을 거둔 뒤부터 그의 후손들은 꼭 아쿠아마린이 물려진 귀금속들을 착용하고 세례명 뒤에 엘로이의 이름을 넣기 시작했다.

 

슈발리에 가의 세번째 가보는 대저택이 위치한 영지 그 자체이다.  정복 전쟁이 정리되어 갈 즈음 파이트라 왕국과 인접한 네레 산맥의 끝자락의 광산을 개발하려 황실은 인재를 물색하고 있었으나, 그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매장량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어 분명히 막대한 부를 불러올 수 있는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안정되지 않은 국경선 사이의 문제를 떠안게 될 것이 뻔해 골치를 앓을 것이라며 귀족들도 하나 둘 물러나던 상황이었다.  척박한 영지로 이주해 영주의 의무를 다하는 일을 버거워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로 한창 골치를 앓다 황실은 적임자를 하나 떠올리게 된다. 황실의 명령이라면 이견없이 수행하고, 성실히 임하는 제국의 검인 슈발리에 백작이라면 군사적인 지도력은 의심할 바 없고, 사업에 있어서도 청렴히 본인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리라 확신할 수 있는 탓이었다. 수익을 크게 나눠주는 조건으로 영지를 내리고 사업을 위해 힘쓸 것을 권유받자 단번에 뜻에 따르겠다고 대답한 그는 노쇠한 부모는 수도의 저택에 머무르게 하고 아내와 영지로 이주해 남은 노년 생활을 그곳에서 보낸다. 

 

백작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엘로이의 재산이 모자랐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나, 수여받은 영지를 관리하고 대가 이어질 수록 그 재산은 점점 더 몸을 불려갔고 지금 대에 이르러서는 철광과 은, 그리고 보석에 이르르기까지 많은 광물들을 캐낼 수 있는 대규모 광산을 관리하는 대부호 가문이 되었다. 영지의 세공업자들은 가문을 통해 도매로 은광석과 철광을 사다들여 귀금속 용으로 세공을 하거나 대장장이 질을 해 갑주를 만들어 제국 곳곳에 납품하게 되니 이는 결과적으로  예술 문화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셈이 되었다. 

 

슈발리에 가는, 가업이 국가 산업과 연결된 만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있다.  따라 그 주인 되는 황실의 풍조에 따라 가주가 정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크게 구분하는 편은 아니나, 적어도 가문 내에서 남성과 여성이 점할 수 있는 위치에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  남성은 가주가 되어 대대로 기사단에 지원했으며, 현 가주 또한 서리 기사단에 소속되어 항상 황실의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가주가 영지의 관리에 온 힘을 기울이기는 어려운 편이라 보통 어린 나이에 총명한 상대를 구인해 정략 결혼을 거쳐 영주의 의무를 다하게 하는 편이다. 자식을 낳을 때에도 무조건 남성이 난 순서에 관계 없이 가주 계승의 1순위로 여겨져 검술을 연마하게 하고, 여식들은 셈과 정치학, 그리고 외교 등의 행정 임무에 능한 인재로 키워낸다. 

 

칼리아스 황태자를 도와 파이트라 왕국의 견제에 힘쓴 바 있으며 왕당파 답게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다. 황태자 책봉식 직후에는 집 안 전체가 한동안 조금 들뜬 분위기였다.

 

그러나 얼마 전 관리하는 영지의 광산이 두엇 산사태로 무너져 안에서 일하면 수 많은 인부들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영지의 분위기가 크게 가라앉았으며 광산 사업도 주춤해 크게 적자를 보았다. 엎친데 덮친 격 슬하에 둔 자녀의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나이가 많은 현 가주,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기사직에서 명예 퇴직을 권고받고 현재 영지에서 기타 활동 없이 요양 중에 있다. 때문에 차기 가주가 될 장자 레이븐에게 가문의 시선이 쏠려있다.

 

금전적 손해는 생활의 규모를 유지하는 데에는 일절 지장이 없는 정도였으나, 황태자를 지지하는 영주를 향한 영지민들의 슬픔과 분노섞인 작은 반발들이 힘을 더해가는 중이다. 그들 말을 빌리자면, 불길한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히려드니 이런 재해가 찾아온 것이라나. 영주 부부는 이와 같은 의견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천한 것들의 의견이라며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

:: 미지의 영역

 

그는 쌍둥이 누이의 표정을 살피는 데 능숙해졌다. 

 

 

 레이븐은 누구도 부르지 않는 복도를 몇 번이고 걷고 있었다. 카페트가 시작되는 곳부터 끝까지. 전부 걷는 데에는 시간이 꽤 드는 편이었다. 왜 걷느냐고 묻는다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복도 한 켠에 있는 스완의 방문, 아주 조금 열린 그 틈을 짧게 엿보기 위해 두 시간 째 의미없이 방황하고 있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그를 한심하게 볼 테니까. 시종이 시중을 위해 계단을 재빠르게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퍼특 정신을 차리고 레이븐은 몸을 돌려 제 방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윽고 먼 곳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완 아가씨, 하는 익숙한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다. 스완의 시종은 지난 몇 년간 눈에 띄게 줄어들어 이젠 감시를 위한 몇 밖에 남지 않았다. 백작가의 영애로 태어나 고작 두 셋의 손에 삶을 맡기는 그 모습이 레이븐에게는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 그는 권위가 무엇인지 실감했다.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는 완벽한 아버지가 되고자 수 년간 노력해왔다. 늦은 아이를 갖고 그들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가진 하나의 틀이 만들어낸 강박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짊어진 만큼의 무게를 타인에게 강요하는데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 기대가 엇나갈 때 마다 돌변해 날카로운 것들을 쏟아냈다. 유너스의 첫 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에도 그러했다. 기사학부의 전공 수업을 수강한 스완이 배부받은 성적표를 보여주며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조심스레 꺼낸 한 마디에 돌아온 것은 칭찬아닌 불같은 호통이었다.

 

"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네가."

 

레이븐은 어머니와 함께 모닥불 근처에 앉아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와 날카로워지는 단어들은 낯설었고, 그가 알고 있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 아니었다. 부모를 거스른다는 생각 따위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순진함에 그 상황을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어머니 곁에 파고들며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했다. 상처받기 쉬운 어린 아이는 비겁한 방관자가 되기를 선택했고 둘의 말다툼은 점차 그 골을 벌려갔다. 대체 아카데미는 뭘 가르치는 게냐? 계속 허튼 생각 하다가는 행정이고 뭐고 집에 다시 불러와 가정교사를 붙여서 가르쳐야겠다.  그 말에 비명처럼 따라붙던 스완의 한 마디를 기억한다. 그렇지만 황태자님과 겨룬 대련에서도 제가 제일 뛰어났었는걸요!

 

레이븐은 주머니에 접어 넣어놓은 성적표를 반듯하게 다려져 있는 옷깃 위로 더듬어보았다. 스완보다는 절대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는 성적이다. 스완이 한다면 더 잘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스완, 우리에겐 자리가 있는걸. 그렇게 소란을 견디며 레이븐은 휩쓸리지 않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빈센트는 황실에 충성되어야 할 자가 황자와 칼을 겨눈 것을 자랑스레 여긴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는 화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매섭게 스완에게로 걸어가 그 손목을 꽉 비틀어쥐고 옻칠을 한 정원 문까지 끌고가 밀어 눈 쌓인 정원으로 내보냈다. 물 빛 오닉스가 깔린 정원은 겨울에도 아름다웠다. 그 풍경을 바라보기를 좋아했으나 레이븐은 그 밖에서 일상복과 슬리퍼 차림으로 버티고 서 있을 누이의 표정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 네가 뭘 잘못했는지 반성하기 전까지는 들어 오지 마라, 학교에 돌아갈 생각도 추호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

 

아버지가 엄한 얼굴로 거실로 다시 걸음을 내딛자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귀족인 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처신이다. 시종들이 몰래 저택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려고 따뜻한 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와 담요를 들고 정원가를 서성여도 빈센트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것들이 자신을 거스르지 못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레이븐은 어머니의 품에서 일어나 어느새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대고 앉은 아버지의 무릎 가에 꿇어앉고 애원했다. 

 

"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 넌 고집부리지 말거라. 예법을 수 년을 걸쳐 가르쳐 놓았더니 감히 제 아비에게..."

"하지만 아버지, 스완은 제 반 쪽이에요... 아카데미에는 계속 같이 다니고 싶어요, 스완 없이는 얼마나 외로운지 상상도 못하실거에요."

"... ..."

"그리고... 스완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거에요, 아시잖아요."

 

고집센 아버지 곁에서 이어지는 애원은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빈센트가 얼마나 훌륭한 아버지였는지, 스완과의 유너스 생활을 또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리고 자신보다도 훌륭한 성적을 받아온 누이의 뛰어남을 칭찬하면서도 더는 탈선이 없을거라고 입이 마르도록 빌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조심스레 비아트리스가 여보, 이제 그만... 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냉전은 일단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들어오라고 해도 좋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버지의 반지에 입맞춘 뒤 레이븐은 스완을 맞이하러 달려나갔다. 

 

"스완, 이제 들어와도 괜찮아. 내가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어... 아카데미에도 다시 갈 수 있어. 정말이야. "

 

손을 내밀고 얼음처럼 차가워진 스완의 손을 잡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렸다는 듯 현관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차가워진 주인을 돌보고 방으로 데려가 더운 물로 씻기기 시작했다. 스완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그럼에도 레이븐은 스완을 찾아가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위로를 위해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처럼 평화롭고 온난했던, 행복한 가정을 되찾고 싶었다. 침대에 앉아있는 스완 곁에 앉아 밝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할 수 있는 즐거운 일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앞에 품위없이 주저앉아 넋두리하듯 중얼거리다 돌아가는 날이 많아졌다.]

 

 

문 틈 사이로 바라보는 스완은 항상 창가 근처에 서 있거나 앉아있어 레이븐의 눈에는 더 애처로워 보였다. 무엇을 보는지 그 어깨 너머로 보고자 해도 너무 멀어 별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무얼 보고 있느냐고 물어도 그 때마다 실없는 말로 대꾸하고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레이븐은 속으로 수 없이 많은 말들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들이 몇 년간 쌓이고 쌓여 이제는 입만 열면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올 일은 없기에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유너스 첫 방학 이후로 주변을 겉돌듯 헤메는 스완에게 감히 다가갈 수도 없었거니와, 아버지가 아카데미에 보내기 전 레이븐의 어깨를 붙잡고 혹여 스완이 연무장 근처에 얼씬거리기라도 한다면 꼭 말하라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에 두려워서 일부러 피한 까닭도 있다. 한 번도 아버지에게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스완도 다시는 그 곳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둘은 닮았다. 동시에 닮지 않았다. 같은 날 같은 얼굴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한 번 마주치는 일 없이 넓은 저택의 끝과 끝에서 맴돌았다. 수련을 위해 마당에서 목검을 휘두르면서도 레이븐은 스완의 방 창문 한 번 올려다보는 일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곱씹었다. 스완처럼 부모님의 짐이 되지 않겠다고. 착한 아들이 되겠다고. 거스르지 않겠다고.

 

유너스의 마지막 해부터 스완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처럼 날을 드러낸 채 레이븐을 대하지도 않았고, 매서운 눈빛을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병세가 악화된 아버지의 곁을 밤새 지키며 간호를 할 때도 있었고, 걸음걸이는 숲의 요정이 엔젤링 위를 사뿐사뿐 거닐듯 가볍고 우아했다. 시종들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는 드디어 스완이 철이 들었다며 기뻐하고 그를 칭찬했다. 다만 그의 분신인 레이븐만은 똑똑히 그 눈 안에 담긴 압축된 증오를 읽을 수 있었다. 본인의 체념과도 닮아있는 그것을. 

그래도 둘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그 무엇도 담지 않은 가볍고 덧없는 대화를 꾸며낸 다정한 톤으로 할 수 있었다. 당장은 그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골은 후벼파기엔 깊었다. 발을 내딛는 순간 진창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대체로 들어맞는다. 소중한 것을 영영 잃을 수도 있겠다던 불안감은 끔찍한 정적으로 찾아왔다. 더 이상은 무서운 이야기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수 없이 많은 생각이 거쳐가는 조용한 밤이 두려워져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캐릭터의 장래희망과 지지 후보에 관해: 

 

지금의 레이븐은 어릴 때 가지고 있었던 순진함이 맹목적인 강박으로 변해서 현 가주인 아버지의 길을 똑같이 밟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반항하며 자신의 의견을 갖고 주장하는 스완을 보며 놀라움의 감정도 느꼈지만, 그 당시에도 지금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스완이 부응하지 못하는 만큼의 무게를 본인이 더 증명하고 훌륭히 짊어져서 부모님을 행복하게 만들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더욱 더 학업에 힘써왔습니다. 최근엔 스완도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며 가정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진 상황이라 전처럼 예민한 상태는 아니지만 냉전 속에서 몇 년 보낸 까닭에 성격이 많이 변했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병세까지 악화되며 기사가 되겠다는 목표는 더 이상 옛날처럼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아닌 어떻게든 이뤄야 하는 현실적인 목표로 다가왔고, 약혼자를 구인하는 어머니를 보며 큰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본인의 정해진 진로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취하고 있는 태도는 적극적이기보다는 체념에 가깝습니다.

 

지지 후보는 당연하게도 가문색을 따라 칼리아스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왜 지지하느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잘 답하지 못합니다, 주체적으로 쌓아올린 신념이 아니라 휩쓸려가듯 수긍하는 정도의 지지이기 때문에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상대의 주장에 쉽게 설득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인지라 타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데에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BGM

 

 

“ 그래, 유스티체. ”

이제 널 이해해도 괜찮겠니.

 

 

Raven Ermesinde Elroy Chevalier

이름 :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나이 : 만 19세

성별 : 남성

학부 : 기사학부-검술과

 

슈발리에 최연소 백작 ,  영지의 제 1 권력자

 

외관 : 백발 벽안 혈색도는 얼굴

 

188cm / 군살없는 단단한 몸매

 

 

흰머리 푸른 눈을 살짝 덮는다, 향유로 가꾼 머리카락은 치지 않고 내리 길러 이제는 허리까지 흘러내린다. 머리를 빗어주던 유모도 이제는 기운이 쇠해 새로운 하녀를 들였다. 짧은 머리의 젊은 하녀는 머리에 손을 댈 때마다 짧게 탄식하며 즐거워한다. 뒷머리에 비해 조금 짧은 앞단의 머리를 말아주는 것이 가장 즐겁다나. 치장에는 취미가 없어 지나친 시중을 무르고 자연스럽게 흩날리게 두고 있다. 어릴 적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머리는 달빛 아래서 빛을 발한다. 마른 근육들은 완전히 자리 잡혔고,따라서 자세도 늠름해졌다. 

어릴 적부터 내보이던 울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텅 빈 표정뿐이다.

잘 익은 살구빛, 혈색 도는 얼굴은 건강해 보인다. 왼쪽 눈 아래로 눈물점이 두 개 자리하고 있다. 입술을 깨무는 버릇을 고쳤다. 의식적으로 무표정을 짓기를 반복하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화가 나면 핏물이 날 정도로 입안을 짓씹지만, 감정적이 될 상황 자체를 기피하게 되니 그럴 일도 드물다. 화려한 귀걸이 취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알이 크고 빛나는 맑은 아쿠아마린을 눈물처럼 가공한 것을 제일 좋아한다.

 

표정이 단조로워졌다. 여전히 웃고 가끔은 분노하지만 진심이 아닌 경우가 더 잦다. 웃어야 할 때 웃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며, 평소에는 냉철을 연기한다. 설익었던 듀오적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제는 무슨 상황을 마주해도 허탈한 표정과 함께 부드럽게 넘기곤 한다. 손바닥은 붉고 흰 흉터로 가득하고 쥐면 굳은살과 흉터 자국 덕에 끔찍한 촉감. 항상 착용하던 흰 장갑은 이제는 영애들의 손을 잡거나, 외출을 할 때에만 착용한다.

옷은 시종들의 손에 의해 반듯하게 풀 먹인 채 단정하게 입혀져 있다. 

 

 

그는 완벽하다.

 

 

 

 


성격 

 신중한 탐사자 / 실리주의자 / 오만한 절대자 / [수동적인 기만자]

온화한 슈발리에 백작님만큼 완벽하신 분이 계실까요?

 

슈발리에 백작님이요? 그분은...

 

 

신중하십니다. 서신을 작성하실 때는 또 어떠신가요, 절대 잉크가 번진 채로 봉투 안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신답니다. 사소한 일에 임하실 때도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라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시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아오시죠. 그 비결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성공이 보장된 길에만 발을 내딛는다는 점이 아닐까요. 

 

사교계를 멀리하시지만, 그렇다고 영애를 대하는 태도가 서툴지는 않으신 백작님. 그저 수줍음이 많으실 뿐일 거예요. 그도 그럴게, 트레스 1년째에 알망드, 카보트, 루르, 미뉴에트, 사라반드, 파바느와 쿠랑크를 완벽하게 추실 수 있게 되었는걸요. 다정하신 분, 비록 아린델 후작 영애와의 혼약 약속은 깨져버렸지만 흠이 있으신 분은 아니랍니다. 본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다정하세요.

 

 

레이븐 도련님이요? 그분은...

 

실리적이시죠. 본인에게 득 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세요. 다른 분들께도 마찬가지예요. 그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시죠. 모호한 관계를 제일 질색하세요, 이유 없는 호의는 빚지는 기분이라며 끔찍해하시고요. 한 번은 제가 도련님의 호의로 몇 주 쉬고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감사한 마음에 가지고 있던 목돈으로 작은 진주 핀을 선물해드리자 질겁을 하시더라고요. 좋은 품질의 장신구는 당연히 아니었습니다만...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글쎄 왜 절 위해 봉급을 쓰지 않았느냐고 나무라시기 시작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면서도 베푸는 일에는 그렇게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빈센트 엘로이 슈발리에 -편히 잠드소서- , 그러니까 도련님의 부친 시절보다 영지의 상황이 나아진 편이에요. 뒤늦게나마 산사태로 가족을 잃은 영지민들의 의식주를 조금씩 지원해주시면서 날카롭던 분위기도 조금 가라앉은 상탭니다. 

 

 

레이븐, 나의 아쿠아마린. 그 아이는...

 

이 집안의 절대자야. 옛날에는 내 말을 잘 듣곤 했었는데 이제는 가끔 늦은 밤에 다가와 다정한 말을 건네는 정도구나. 얼마나 말도 잘 듣고 착하고 예쁜 아이였는지 몰라. 표정은 시무룩하고, 울음도 많아 눈가가 항상 붉어서 걱정했는데 지금은 어엿한 가주가 되었단다. 아버지와 정말로 꼭 닮았어. 밤마다 몰래 서재에 놀러 가 엘로이의 이야기를 읽더니 그 충성심과 순종하는 자세만큼은 정말 일류 기사의 것 아니겠니. 황제 폐하의 훌륭한 검이 될 거야. 빈센트도 이 모습을 봤다면... 좋아했을 텐데.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는...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열화 된 의지 그 자체다. 내면의 설익은 알맹이를 들킬까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숨을 죽이고 있다. 분신과 같은 날, 같은 무게로 태어났으나 그와 나는 수평 위의 추와도 같다. 나는 무게에 천천히 침잠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중 그의 것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타인들이 바라는 대로 착한 아들, 완벽한 가주, 온화한 도련님, 훌륭한 학생이 되었으나 정작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웃음 하나조차 웃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만 내비치고는 했으니 그 위치에 걸맞지 않게 얼마나 소심하고 수동적인가. 이러한 모습은 그의 부모에게 있어서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잘 길들여진 사냥개로 자라났으나 정작 주인의 명령 없이는 그 자리에서 일어설 줄도 모르고 굶어 죽어갈 운명인 것. 그것이 자의라는 것이 없는 레이븐의 운명인 듯했다.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명령은, 홀로 남은 순간에도 완벽하게 의무를 다할 것.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에게 가장 두렵고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장례 날, 그는 타인의 의지를 뒤집어쓰기를 선택한다. 어떤 선택을 내릴 때에도 자신이 아닌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할지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모호한 선택지들을 골랐다. 수직으로 꽂히는 권위의 압박에 익숙한 그는, 그만큼 절대자의 자세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본인이 사냥개로서 자라난 것처럼 다른 이들을 개처럼 부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부당함을 지적하지 않는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파도스의 24일에 탄생. 

 

父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현 가주 및 전 서리 기사단 소속 기사 (死)

母 비아트리스 아이텐샤 엘로이 슈발리에,  영주 대리인 및 저택의 관리자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백작.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가문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가주 자리에 오른 남자. 

 

1.

 제국력 1035년 이포모니의 다섯째 날 13시, 전 가주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편히 잠드소서- 가 영면했다. 공교롭게도 그에게 전할 서신을 작성하고 있던 순간 그 소식이 레이븐에게 전달되었다. 당일 울린 승전보를 아버지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무거운 짐과 같았으나 정작 그 소식을 받아보아야 할 절대자가 시체가 되어버렸음을 알리는 작은 서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스완 영애에게도 내용을 전달하라는 말에 직접 그의 방에 걸음하여 서신을 건네고 돌아나오는 날, 그는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웃음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함부로 경멸할 수 없었다. 그저 의무와 무게의 이동이 이뤄지고 있음을 직감했을 뿐이다. 이는 그의 안에 남은 작은 자의에게 내려진 일종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모두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아버지의 죽음에도 그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보였다. 누군가는 의젓하다고 말했으며 누군가는 비인간적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명명하던 냉소적인 태도가 이질적이라는 의견만은 동일했다. 그런 말에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 것 뿐이라고 멍하니 제 자리를 지키는 도련님 대신 다른 사람이 대신 대꾸해주었다.

 

2.

 저택은 후계자인 작은 도련님의 사지를 재고 한 뼘 단위로 찢어보며 자리에 부합한 사람인지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설익은 태도는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기에는 어설펐으며, 발을 구르는 걸음걸이는 종종 경박스러웠고, 자주 감정적으로 변해 눈을 붉히는 모습은 추잡했으며, 상처를 만들고 덧내는 습관들은 기가 막혔다. 시종들은 사교계며 정치계며 할 것 없이 일찍 도마 위에 올라 무참히 칼질 당하게 될 레이븐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이 결점들을 모조리 매끈히 갈아내고야 말겠다고. 

그는 아쿠아마린이었고, 칼날들은 그를 세공하는 마땅한 손길이었다.

비아트리스 아이텐샤 엘로이 슈발리에는 남편의 죽음 이후 심적인 병을 얻어 기운이 쇠해 영지 대리인의 역할을 내려놓고, 레이븐이 직접 선발한 소수의 영특한 하녀들과 함께 칩거에 들어갔다. 따라서 행정 관련 업부는 그의 누이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가 15살의 나이부터 지도받아 처리해왔다. 스완은 틈을 파고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저에게 꽂힌 틈을 타 저택의 그림자 안에서 여러 득을 취해 자신의 발판을 다져가는 모습을, 그는 쏟아지는 빛 아래에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저택의 사람들은 이런 관용을 의아하게 여기며 동생인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의 자리를 위협하려 들지는 않을지 염려했다.  슈발리에는 바뀌지 않는다. 슈발리에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야한다. 그의 그 생각만은 여전히 굳건했으나 그는 분신의 탈선을 용인했다. 방관하며 말리지 않았다. 침묵은 곧 지지로 읽혔다.

듀오 3학년의 과정을 끝마치고 검을 쥐겠다고 전과 신청을 한 스완에게 충고의 탈을 쓴 비난이 쏟아지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어미 비아트리스 만큼은 멍청한 것이 끝내 어릴 적 꿈을 놓지 못했다며 비난했다. 수그러든 모친의 기상에 스완은 더는 주눅들지 않았다. 가문의 사업에 손을 대어 빼낸 개인 자산을 내새워 독단으로 전과 신청을 하고도 안정적으로 학비를 지불할 수 있는 독자적인 경로를 만들어 2차 진급 시험 이후 아예 저택을 떠나 수도에서 생활하기에 이르른다. 이에 대해서도 가주가 될 네가 입장을 확실히 해야한다며 비체가 날카롭게 지적했으나 침묵 외에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레이븐은 저택에 남겨진 번뜩이는 누이의 눈과 귀도 잘라내지 않았다. 대신 말이 지독히 없어졌다.

 

3. 

 

듀오 3학년, 아린델 샤릿테 예 사르반 후작 영애와 혼약을 위한 만남을 가지고 작은 규모의 약혼식을 진행했었다. 함께할 때 모습이 퍽 다정하고 애틋하여 잘 어울리는 금슬 좋은 한 쌍이 될 것이라며 양 가문에서 오가는 말들은 많았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뜻을 거두고 갈라서게 된다. 일찍이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 영애의 가문 내에서의 미묘한 위치와 흔들림 없이 굳건해야 할 슈발리에 가문 내의 혼란의 씨를 감지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아린델 영애는 손 발이 하얗고 가녀려 사르반 후작 내외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며 자라왔으며, 그만큼 귀한 딸을 다른 집안의 혼란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정중한 서신에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가 직접 답을 해 오가는 혼담을 정리했다. 누이가 있어 혼인의 압박에도 어느 정도의 유예가 있었다. 비체는 못마땅해 했으나 더는 혼약자를 구인하지 않았다.

 

4.

걸맞는 자만이 이 자루를 쥐도록 하라. 

1038년 리고르의 달에 누이없이 가주 계승식을 치뤘다. 빈센트가 지정한 서기가 엘로이 슈발리에의 초상 앞에서 전 가주의 유언, 가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력, 동시에 황실의 검으로서 기억해야 할 의무를 읽어주는 것이 계승식의 기본적인 틀이었다. 무릎꿇은 레이븐의 달 아래 핀 꽃 같은 흰 머리칼 위에 뿔 안에 담아둔 진한 향유를 뿌리고 황제로부터 하사받았다는 그 검으로 양 어깨와 머리를 천천히 짚는다그는 눈을 감고 불려진 모든 권력과 의무를 기억하겠다고 답하는 것으로 슈발리에 백작이 되었다.

계승식에 참여했던 이들의 입술 위를 꾸준히 오르내린 화제는, '백작의 누이, 스완 유스티체 슈발리에는 어디에 있는가?' 였다. 슈발리에 쌍둥이가 완전히 갈라섰으며 누이인 스완이 감춰두었던 뱀과 같은 탐욕을 드러내어 순진한 동생을 집어삼키려 든다느니, 슈발리에의 굳건한 정통성이 이 탓에 깨어지는 것이 아니냐며 입방아를 찧어댔다.

슈발리에가 부리는 시종들은 레이븐의 느슨한 관용 속에서 지나친 사견을 덧붙여가며 숙덕거리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마땅한 대가는 저택에 돌아온 영지의 실질적 주인, 스완이 그들에게 치루게 했다. 전 가주 빈센트 - 편히 잠드소서- 때부터 현명한 조언으로 가주의 곁을 지킨 충신들이었으나, 그들은 누이가 불러온 새 바람의 향을 맡지 못하는 오래된 목석들이었다. 입이 가벼운 자들과 어찌 큰 일을 도모하겠냐는 말과 함께 슈발리에를 의심한 이들을 모조리 저택에서 내쫓는 모습도, 레이븐은 그저 바라만 보며 다시 들이지 않았다. 예외로 그에게 찾아와 무릎꿇은 소수의 시종들의 복직을 허락해 열일곱 어린 나이에 갖춘 그 잔인함에 모두를 질겁하게 했다.

영지에는 누이의 처분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더해졌다. 첫번째로,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있겠다. 가주인 동생의 관용을 등에 업고 있으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 눈에 드는 것도 없는 게 분명하다는 비난조였다. 둘째로, 슈발리에 가의 보수적인 가풍은 과거의 잔재와도 같으니 '성별을 이유로 학생이 가지는 배움의 자유에 침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며 그녀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저택의 사람들은 스완을 두려워함과 가주의 지나친 관용에 불만을 품었다.

 

5.   

 

누이인 스완의 약혼도 상대의 일방적인 통보로 파토나기에 이르렀으니, 그 이유는 검을 쥔 여자를 들일 이유도 여유도 없다는데 있었다. 그들은 빈센트와 비아트리스가 그러했듯 인형처럼 희고 보기 좋고 다루기 쉬운 영애를 원했다. 힘없이 그들의 뜻에 따르고 다정한 목소리로 가주 옆에 앉아 필요한 조언을 조심스레 할 시종이 필요했다. 정작 당사자는 알지 못했던 것인지, 아카데미까지 찾아와 철없이 눈물을 흘려대며 애원하는 추태를 부렸다는 소식이 레이븐의 귀까지 들어왔으나 이는 오히려 흠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도마 위에 올랐을 스완을 구해준 것이 다름없는 미련함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코웃음을 치며 넘어갔다.

쌍둥이의 혼담이 모두 흐려지고 그 이후 배우자를 찾는 것 같은 움직임도 전무하니 슈발리에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1038년의 늦봄, 성공적으로 데뷔탕트를 마친 후 그런 소문은 종식되었다.

가문의 상징인 보석과 장미, 그리고 금테로 꾸며진 파티용의 백색 마차를 타고, 둘은 황실 무도회장에 함께 도착했다. 백토 들판의 무덤에 피어난 흰 꽃처럼 얇고 꼭 끼는 창백한 드레스와 정장을 입고 서로를 향해 배운대로 다정하게 미소짓는 두 남매의 모습은 가히 기록될 만큼 완벽하게 박제된 우아함이었다. 품이 넓은 흰 소매 끝에 달린 레이스 사이로 드러나는 손은 둘 다 흰 장갑으로 가리고, 허리와 손을 잡고 샹들리에 밑에서 흐르는 새벽 바람처럼 몸을 움직인다. 귀와 손, 옷 위마다 작게 수놓아진 아쿠아마린이 빛을 받아 번쩍이며 빛났고 이는 그들의 시대가 막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처럼 당당하며 아름다웠다. [개인이 곧 가문이 될 수 있으며, 말 한 마디로 정치판 위의 어떠한 말이 될 수도 있다는 무게를 자각한 이들의 발걸음은 완벽했다.]

 

6. 슈발리에 영지에는 제국 전체의 상황을 축소한 것처럼 세 가지 파벌이 존재한다.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의 혁신적인 행보에 찬성하는 자들과, 그들의 온화한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가 엄연한 백작이자 영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누이가 지나치게 손을 넓힌다며 비판하는 자들로 둘로 나뉘었고, 그들 사이에서 영지만 잘 지켜지면 그들 쌍둥이가 내전을 일으키든 - 불경한 말이지만 - 사랑에 빠지든 한낱 자유 신민이 상관할 마 있느냐고 한 발 물러서는 자들도 있었다.

슈발리에 쌍둥이는 그러한 여론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밝히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레이븐은 정통성을 대표하듯 여전한 황태자 지지 의사를 밝혔고, 스완은 선황녀를 지지함을 암묵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아 지적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에 머물러 레이븐 곁의 왕당파 충신들도 함부로 그의 누이를 비난하지 못했다.

 

 


 

 

 

어머니 비아트리체와 더는 함께 생활하지 않는다. [트레스 2학년 겨울방학 도중 '요양'이라는 목적 하에 수도에 매입해둔 작은 저택으로 보냈다. 스완과 레이븐의 모든 일에 불만을 표출하며 사사건건 옳지 않다고 말하는 태도에, 단지 부모라는 이유로 베풀 아량이 부족했던 스완이 국경에서 살기엔 너무 쇠약해지신 것 같은데, 안전한 수도로 요양을 가시면 어떻겠느냐고 웃으며 말을 꺼낸 것이 발단이었다. '감히'로 시작하는 말과 함께 성화를 내려던 비체는 예상 가능했으나 곁에 앉은 레이븐이 넌지시 덧붙인 말은 상당히 의외였는데, 침묵하거나 말리는 것이 아니라 저희도 이제 다 컸으니 가서 푹 쉬시라는 말로 스완에게 동조했기 때문이다. 가주의 말엔 제아무리 아들일지언정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비아트리체는 끝내 고집을 그만두고 수도로 떠났다. 레이븐이 직접 선택한 시종들과 함께였다. 바야흐로 완벽한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 방학마다 빠짐없이 저택으로 돌아와도 승마와 검술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듀오 1학년 때 루카스 솔렌 블랑샤 영식에게 선물받은 백마를 길들이는데에는 특히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여 시종들이 유난하다는 평을 내렸다. 이름은 마리 앤. 흰 가죽 위에 얇게 두드린 금장과 아쿠아마린을 물린 등자와 고삐를 달아 마구간지기가 아주 부담스러워 했다.

- 아버지인 빈센트를 닮아 매년 키가 꾸준히 커왔다. 비아트리스의 관리 하에 놓여져 몸매 관리를 위해 금식을 하던 스완과는 달리 식사의 제한도 두지 않고 운동과 스트레칭을 매일 하며 시종장과 신장 체크를 주기적으로 해왔다.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사소한 생활 양식과 신체 조건부터 차이가 나야 한다는 그의 조언 때문이었다. 따라서 매년 평균 4센티미터씩 꾸준히 성장하여 살아생전 185 정도의 거구였던 빈센트보다도 더 크게 된 모양. 요즘은 근육과 맵시 관리를 위해 하루에 두 끼정도로 식사 횟수를 줄였고 성장이 더뎌질 무렵과 맞물려 더 자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듀오 시기 받은 검은 서재에 걸어두었고, 그와 닮은 진검을 다시 만들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선물하는 검이 아닌, 스스로가 쥐기를 결정한 검은 묵직한 슈발리에의 강철로 만들어졌다. 보석을 물렸지만 투박한 가공을 거친 경도가 높은 것을 알째로 물렸고, 그 손잡이에는 푸르게 색을 입한 양가죽 띠를 둘러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파멀은 묵직한 강철을 두드려 날선 모습으로 가공하고 색을 입혀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짝을 이루는 방패에는 화려한 보석따위 박혀있지 않으나 얕게 홈을 파 은을 입혀 장미 덩굴을 그려낸 세밀하고 정교한 모양이라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곤 한다.

- 흰 토끼 아델레이드는 듀오 1학년 시기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듀오 2학년 접어드는 시기 운명했다. 어수선한 가문 분위기 덕분에 제대로 된 무덤도 만들어주지 못하고 가문의 소각장에 무심하게 버려지는 어이없는 끝을 맞았다.

-굽이 높은 신발들을 신는다. 보법을 연습하기 위해서다. 그 누구보다 조용히, 우아하게 걷기 위해 교양 수업때 택했던 방식이 탁월하게 성과를 내게 되면서 습관적으로 착용하게 되었다. 낮은 굽을 신을 때는 걷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약속의 무게를 알고 있다. 모든 약속은 그의 의무가 되어 함께한다. 검을 쥘 때 그것들을 잊지 않는다.

 

 

 

 


 

 

슈발리에 백작 가 家

 

전쟁 영웅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후손들

 

 

" 슈발리에의 아이를 짐승처럼 키워라. 헛된 것을 보는 눈을 가리고 주인의 충견이 되게 하라.

그 몸뚱이는 검집이요 의지는 검이 될테니, 오로지 제국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지어다."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연대기 중 발췌-

 

 

 슈발리에 백작의 성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세 가지 가보가 있으니, 하나는 북 쪽의 벽에 걸린 피투성이 수급의 머리칼을 들어 올린 채 정면을 주시하는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초상화요, 하나는 그 업적을 기리며 황제가 그에게 하사한 명검, 나머지 하나는 역시 황제의 관대함과 축복으로 선물 받은 영지였다. 이 세 가지 보물들은 차례로 이어져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연대기이자 찬송가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1대도 아닌 13대 가주인 그의 이름이 후손들의 성 앞에 당당하게 자리 잡혀온 이유가 된다.

 

 초상화는 가주의 서재를 열면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걸려있다. 수급에서 흐르는 핏물의 묘사가 당장 비린내가 날 만큼 생생함에도 이 초상이 흉물로 여겨지지 않으며 아이들에게도 숨김이 없는 것은 엘로이 슈발리에의 경건한 표정 덕분이다.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초상화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마저 꿰뚫을듯한 명료한 눈빛과 떨림 없는 손, 빛나는 검이 잘린 목이나 핏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엘로이 이후의 가주들은 이 황금 같은 초상화 앞에 제 아이들을 세워놓고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육한다.

 

 작고 큰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던 정복전쟁의 시기, 기사의 명예를 지키고 귀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천성이 저돌적이며 위치의 무게를 알만큼 겸손하던 슈발리에 백작가의 적자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는 황실의 검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와 함께한 많은 검들이 부러지고 무뎌졌으며 이가 나간 것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척박한 전쟁의 바람 속에서 필멸자들은 상처를 돌보고 실력을 연마함과 동시에 그것이 순리인 듯 끝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엘로이 슈발리에, 위대한 기사요 용맹무쌍한 젊은이인 그는 운명에 순응할 생각보다는 그것을 도발하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어느 날 긴 원정으로 지친 기사단이 끝내 잠을 청하는 중에도 그는 깨어 불가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들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솟아오르는 불씨를 목격했을 때 그는 그것이 적이 피운 주둔지가 출처임을 직감했다.

 

 실력으로 판가름했을 때, 엘로이 슈발리에는 결코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그를 가문의 영웅으로 만든 것은 그의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굳건한 신념이었다. 그의 원동력은 황실에 대한 복종, 개인의 욕심이 결코 아니었으며 나라의 부흥과 존경하는 이의 안존을 위한 것이었으니 무엇보다 순수했고 절대적인 힘이 되어주었다. 어두운 밤에 큰불을 피운다는 것은 근처에 적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고백이며 방어태세를 제대로 갖추고 있을 리 없다는 믿음 하나로 그는 기사단장에게 달려가 자신의 가장 충직한 다섯 맹우들과 함께 선발대에 설 수 있기를 간청했다. 깊은 밤, 밤의 새조차도 울음을 멈춘 시간에 여섯 기사들은 적의 목을 베기 위해 갈라진 땅 위를 디뎠다.

 

 그는 결국 그의 검으로 적장의 목을 베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초상화에 그려진 그의 업적이다. 다섯 맹우의 호위와 지원군에 힘입어 엘로이는 큰 피해 없이 매복군의 완전 제압에 성공하였고 이 사건은 지친 원정으로 지친 제국군의 사기를 돋우는 데에 큰 기여를 하여 후에 임한 전쟁의 대승이라는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방심한 것을 노렸을 뿐이라는 겸손한 태도가 소문의 크기를 더욱 부풀려 속도를 얹고 수도까지 퍼져나가게 했다. 적장의 목을 베어 온 붉은 기사 슈발리에, 젊고 용맹한 엘로이. 끝내 황실에까지 닿은 소식을 들은 황제는 그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붉은 기사를 위한 루비를 박은 명검을 하나 준비한다.

 

 그러나 왕과 마주한 붉은 기사의 눈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푸른빛의 젊음과 생기가 가득했다. 붉은 기사라더니, 꼭 백사장의 파도를 굳힌 것과 같이 푸르구나. 황제는 황실의 세공사를 불러 루비 대신 그 눈을 쏙 빼닮은 아쿠아마린을 대신 물려 그 손에 쥐여주라고 명한다. 엘로이 슈발리에는 그 몸이 노쇠하여 은퇴할 때까지 그 검과 함께 했고, 후배 기사들은 검에 박힌 푸른 보석을 보면 누구나 존경과 예의를 표했다. 이 명검은 그가 한줌 재로 사라진 뒤에는 저택의 벽에 걸려 가보라는 이름으로 후손들의 원동력이 된다. 검에 경건한 인사를 올리며 이 보석에 엘로이의 혼이 깃들었다고 혹자는 얘기했다.

 

 세 번째 가보인 영지에는 슈발리에 가의 대저택이 위치해있다. 전쟁이 정리되어 갈 즈음 황실은 파이트라 왕국과 인접한 네레 산맥의 끝자락의 광산을 개발하려 인재를 물색하고 있었으나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수많은 학자들의 답사 결과 광산 내부의 매장량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어 막대한 부가 예정되어있는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안정되지 않은 국경선 사이의 문제를 떠안게 될까 1번 후보였던 귀족들이 하나 둘 물러났기 때문이다. 척박한 영지로 이주해 영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버겁지 않을까 얘기하던 이들도 많았다. 이로 한창 골치를 앓다 황실은 그들에게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한 남자, 제국의 검이자 붉은 기사, 슈발리에 백작을 떠올렸다. 군사적인 지도력 하며 사업에 있어서도 청렴할 것이라고-황실이 내려준 땅에서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은 큰 불온임이 분명하기 때문에-확신할 수 있는 탓이었다. 수익을 크게 나눠주는 조건으로 영지를 내리고 사업을 위해 힘쓸 것을 권유받자 단번에 따르겠다고 대답한 그는 아내와 시종들을 데리고 이주해 남은 노년 생활을 그곳에서 보낸다. 수도에 남은 슈발리에 저택은 그의 노쇠한 부모가 마지막으로 맡아 관리하다 생이 끝날 즈음 나라에 기증했다고 한다. 저택은 곧 허물어지고 새로운 공공기관이 세워졌다.

 

 백작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엘로이의 재산이 모자랐던 적은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수여받은 영지를 관리하고 대가 이어질수록 그것은 점점 더 몸을 불려갔고 지금 대-어린 쌍둥이가 있는-에 이르러서는 철광과 은, 그리고 희귀한 보석들에 이르르기까지 많은 광물들을 캐낼 수 있는 대규모 광산이 되었다. 그를 관리하는 가문이 대부호인 것은 수학 공식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영지의 세공업자들은 도매로 은광석과 철광을 사다 들여 귀금속 용으로 세공을 하거나 대장장이 질을 해 갑주를 만들어 제국 곳곳에 납품하고 있으니 이는 결과적으로 예술 문화 발전에도 슈발리에 가가 큰 기여를 한 셈이 되었다.

 

 이렇듯 슈발리에 가는 모든 것이 황실에서 비롯되었으며 가업조차 국가 산업과 연결된 만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있다. 따라 주인 되는 자는 황실의 풍조에 따르는 것이 당연했고 집안 내부에서의 역할 역시 그 풍조에 기반을 둔다. 시대의 큰 흐름을 아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니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크게 구분 짓지는 않으나 적어도 점할 수 있는 위치에는 성별에 따른 한계가 정해져 있다. 가주는 남성이 맡으며 그들은 대대로 기사단에 지원한다. 현 가주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역시 서리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황실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는 파이트라 식민지 전쟁에서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황자를 도왔다. 이런 연유로 가주가 영지의 관리에 온 힘을 기울이기는 어려운 형편이니 대부분 어린 나이에 총명한 상대를 구인해 정략결혼을 거쳐 영주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 자식을 낳을 때에도 무조건 남성이 난 순서에 관계없이 가주 계승의 1순위로 여겨 검술을 연마하게 하고, 여식들은 셈과 정치학, 그리고 외교 등의 행정 임무에 능한 인재로 키워내어 가주가 딱 맞는 신부를 찾을 때까지 모친을 도와 영지 관리를 돕도록 한다.

 

 그러나 몇년 전 관리하는 영지의 광산 두어개가 산사태로 무너져 안에서 일하던 수많은 인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영지의 분위기가 크게 가라앉았으며 광산 사업도 주춤해 크게 적자를 보았다. 금전적 손해는 생활의 규모를 유지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 정도였으나, 황태자를 지지하는 전 영주를 향한 영지민들의 슬픔과 분노 섞인 작은 반발들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가 숨을 거두고 비아트리체 아이텐샤 엘로이 슈발리에가 자취를 감춘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전 가주 빈센트는 칼리아스 황태자를 도와 파이트라 왕국의 견제에 힘쓴 바 있으며 당연하다는 듯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황태자 책봉식을 집의 경사인 것처럼 여겼다. 황제의 선택이 곧 법인 슈발리에에겐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슈발리에의 여식, 새로운 백작의 누이, 스완 유스티체 슈발리에만은 그 뜻을 달리함을 밝혔다. 그리고 현 가주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가 누이의 행보를 탈선이라 여기지 않음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나라의 혼란과 여전한 재해들에 슈발리에의 새 주인들은 보다 영민하게 대처했다.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백작은 훈련소에 지원하길 바라는 영지민을 소집해 이동 기간 동안의 물자와 운송 수단을 지원했으며 영지의 관리자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는 산사태와 그로 인한 광산의 붕괴를 막기 위해 보존 사업에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다. 결과는 훌륭했다. 슈발리에의 새 주인, 새 시대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들은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 의무를 너무나 잘 이행하고 있었다.

 

 또한 슈발리에 백작은 이전 사건의 피해자들을 관대하게 살피고 의식주를 지원하며 달래어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국에 비해 영지의 상황만큼은 많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충분한 보상이 아니라며, 하잘것 없는 동정을 자비처럼 내려주는 태도가 못마땅한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온화하다는 수식어와는 관계 없이 귀족인 그가 평민이나 자유 신민의 잔투정에 귀 기울일 이유는 전혀 없었으므로 무시로 일관했다. 꼭 그의 부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

:: 끊기지 않은 맹약

 

"너무 늦진 않았을까."

"함께 해줘."

 

흰 구두굽이 잘 닦인 복도를 작게 두드리며 지나간다. 완벽한 보법 탓에 다소 높은 굽에도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똑, 똑, 똑, 어린 아이의 노크 소리가 이러할까. 숨죽이고 선을 넘어가도 되느냐 중얼거리는 작은 물음과도 같다. 그 발걸음이 멈춰선 곳은 누이의 방 앞이다. 어린 날 이 틈을 들여다보기 위해 수없이 이 복도를 헤매였던 것이 떠오른다. 친숙한 허상을 시야에서 물리며 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서리낀 창가도 이제는 제법 낡아 찬 바람이 새어들어올텐데도, 그는 그 곁의 의자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 고요히 서서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방향을 같이 바라본다. 이젠 닮았다고도 못하겠어, 울리는 작은 말이 있다. 자신과 두 뼘은 차이날 작은 누이가 아직도 낯설다는 것처럼 고개를 조금 기울여 시선을 맞춘다.

 

"온실을 허물었어. 알고 있었겠지만."

 

"... ..." 

 

"빈 자리엔 구근을 심었어. 겨울이 지나면 싹이 틀 거야, 그리고 다시 지고... ..."

 

정말로 그랬다. 한 때 가벼운 검을 쥐고 뛰어다녔던 정원의 좁은 한 켠, 세워져 있던 유리 온실은 거둬지고 정원사들이 갈아놓은 검붉은 흙이 보였다. 지금은 무엇도 보이지 않지만, 그의 말대로 혹한이 지나면 구근은 싹을 틔울 것이다. 봄이 되면 푸르게 피어나 정원사에게 부탁해 마법을 걸어 보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그래, 아름답겠구나. 그렇게 조용히 답했다. 시선은 먼 곳에서 떼지 못했고, 목소리는 학습된 다정함이 묻어났지만 드물게 투명한 진심이 드러난다. 피어날 아마릴리스를 기대하며 누이의 짧아진 흰 머리칼 쪽으로 손을 내어 잠시 끝단을 매만진다.

 

이러한 기대를 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저 매일 다가오는 하루에 휩쓸리고 닳고 깎여나가며 고통스러워 하느라 너와 나는 서로를 마주할 시간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 의무를 말하는 나는 단단했고, 동시에 어설펐으며 모순투성이인 말들로 분신인 너를 찌르곤 했었지. 뒤늦게 옅은 후회를 한다. 그것조차 틈이라고 배웠기에 드러낼 수는 없었으니 눈만 길게 감았다 뜰 뿐이었다. 우리는 아마도 다시는 같은 길을 걸을 수 없겠지. 어느 날, 서로의 숨통을 끊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시선을 내려 바라본다. 그러나 나는 약속을 잊지 않았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나의 누이, 스완, 너를 애틋하게 여길 것이다. 너는 나의 맹우니까.

 

눈이 내리는 계절이 끝나간다.  혹한을 견뎌낸 네게 주어진 봄이 다가온다. 

바야흐로 너의 시대가, 우리가 만개할 시대가 날아든다.

 

 


 

 

 

캐릭터의 장래희망과 지지 후보에 관해 : 

 

칼리아스 황태자를 지지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버지와 엘로이 슈발리에의 의지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치환해 '레이븐' 의 의견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없이 순수하며 맹목적이라 단단합니다. 근거는 정통성 단 하나에 기반해 있습니다. 

스완의 탈선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의 정치색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억눌려 자랐던 둘의 괴로웠던 유년시절에 대한 동정과 무게를 짊어진 지금에서야 할 수 있게 된 뒤늦은 이해에 기반한 것입니다. 슈발리에의 절대자로서 내리는 관용에 가까운 것으로 만약 칼을 겨눠야 할 순간이 온다면 마땅히 서로를 전력으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로 가야 할 길이 달라도 그 방향성마저 상대의 일부로 포용하게 될 정도로 시간이 날카로운 부분을 많이 갈아냈습니다. 

장래희망은... 기사단에 들어가 황실의 검이 되는 것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황태자 직속의 창공의 기사단에 들어가거나 서리 기사단 소속이 되어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합니다. 기사단장이 되면 좋겠지만... 성적이 따라주지 않을 것 같네요...

 

 

 

" 네 미래가 되고 싶어. "

 

 

 

Raven Ermesinde Elroy Chevalier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18세, 3학년

188cm , 단단하게 자리잡힌  근육.

 

 

 

장신에 체격이 좋은 편이라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편이다. 입는 옷은 주로 흰 계열. 머리칼과 잘 어우러진다. 한 쪽으로 가르마를 타 넘긴 머리칼이 푸른 시선에 닿을 듯 말듯 하게 늘어져 흩어져 있어 오른눈은 희미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인상이 흐릿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낮이나 밤이나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의 시선 안에 빛이 들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 그러니 흰 속눈썹 아래 자리한 눈은 맑은 파도의 색이니 빛을 받으면 금방 번뜩이며 제 자리를 견고히 한다. 크리켓과 승마를 취미로 삼아 바깥 출입이 잦았던 덕에 피부 톤은 햇밫을 적당히 머금어 건강해보이고, 두 볼은 항상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미미한 붉은 빛이다. 왼 눈 밑으로는 떨어지는 눈물처럼 두 점이 좁은 간격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 무표정한 편. 자신의 패밀리어 곁에 머물 때는 예외.

우직한 기사 가문인 슈발리에의 장남답게 어릴 적부터 검술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재능은 뛰어나지 않아 실수가 잦았다. 두 손등과 바닥부터 팔꿈치까지 잘게 남은 베인 흔이 증거다. 도톰한 귓볼을 꿰뚫은 것은 아쿠아마린이다. 별을 닮은 은조각에 걸린 날카롭게 세공된 보석 조각은, 슈발리에의 사람이라면 예외없이 착용하는 것. 가볍고 부숴지기 쉬운 이 작은 조각에 담겨진 가문의 바람은 그만큼 걸맞지도 않게 거대하다. 

보석을 착용한다는 것은 그에게 익숙한 언어이고 하나의 절대적인 약속이다. 발 목에 걸린 금붙이에 매달린 루비와, 왼 손 약지의 문스톤. 각각 회귀와 미래.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백작의 총 평은 슈발리에 답게 단단하다로 일관된 편이다.  수 많은 기사들을 배출해낸 명가임을 생각해보자면 그리 부정적인 평은 아니다. 굳이 한 꺼풀 벗겨보자면 고집스럽고 우기는 데 익숙하다는 뜻이지만.

    

슈발리에의 가주들에게 요구되는 몇 가지 덕목들이 있다. 주군에게 절대 복종할 것, 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마할 것. 이게 가장 기본이 되는 뼈대라고 한다면, 수 백년이 지나며 이 이름을 가진 이들이 부가적으로 더한 허물들도 있다. 오만함과 고집스러움, 그리고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강요되는 순종들이다.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백작은 이와 같은 덕목들을 훌륭하게 받아들였다. 동시에 이런 불균형적인 교육방침으로 인해 생겨난 약점들도 존재한다.

    

개인의 개성을 아무리 눌러놓아도, 그 결마저 지워버릴 순 없다. 조심스러움에 더해진 예상할 수 없는 변덕스러움이 아마 그 잔재일 것이다. 상극인 것에 쉽게 끌리고, 차가움을 표방할 때 그 누구보다 다정한 것들 바라므로 자신의 이름에 독이 되는 것들을 좋아한다. 언어까지 솔직해진다면 아마도 자신을 믿어준 가족들을 배반하는 일이 될테니, 항상 말과 행동이 어긋나버린다. 하면 안돼. 그러면 안돼.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삶은 흘러간다.

 


 

필드 속성

벽 The wall.

 시전자의 견고한 세계를 지키는 보이지 않는 벽입니다. 

분류

속성: 무효 

필드 영창

영창: "나는 너를 나의 세계로 삼으려 해."

영창 효과

 

  이 '세계'를 정의하는 것이 필드의 가장 기초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를 둘러싼 벽의 속은 텅 비어있고, 그 안을 채워내는 것은 온전한 시전자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란 시전자 본인이 될 수도 있으며, 타인이 될 수도 있고, 또는 그 무엇도 아닌 간절한 한 물체일 수도 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 (Ex. 타인의 행복 등) 에겐 적용되지 않고, 보통 물리적인 손상을 무효화하는 쪽으로 활용됩니다. 범위는 그리 크지 않은 편으로 가로 세로 20미터의 공간 속의 물체와 생명체에게만 적용됩니다.

  효과: 시전자의 '세계'라고 정의 당한 물체나 생명체에게 가해진 손상과 상태 이상을 침범으로 간주, 무효화 할 수 있습니다.

 

 

 

 

 

 

 

 

 

 

 

 

 

 

 

 

 

 

슈발리에 백작 가 家

 

父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死)

母 비아트리스 아이텐샤 엘로이 슈발리에

*

姉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 현 영주 대리인 및 백작의 누이.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 백작.

 

 

    

1장. 

슈발리에

      

    

너른 서재의 한 쪽, 얇게 세공한 오닉스 판을 씌운 탁자 위에 햇빛이 오래 머물렀다가 사라진다. 서재의 한 면은 통으로 오색 유리들을 이어붙여놓은 창이었고, 탁자 뒤에는 너른 벽을 길게 둘러싼 책장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장은 모두 누군가의 이야기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것은 두 팔의 강인한 힘도 아니요 날카로운 검의 날도 아닌 그 것을 능숙하게 다루던 어떤 이들의 기록이다. 이야기는 읽히고 되새길 수록 힘을 더해가니 슈발리에의 가주들은 그렇게 스스로의 역사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야기는 곧 어떤 이야기의 잔뿌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슈발리에의 귀감이 되는 이, 그가 바로 슈발리에의 13대 가주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 백작이다. 

    

전설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 부풀려진 이야기들에 비해 실상이 초라하다 할 지라도 그 후손들의 행동거지와 태도들이 그 이야기의 살이 되어주고, 설령 거짓이더라도 힘을 얻게 된다. 기록물로 남은 그의 업적은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변경백에게 크고 작은 전투야 흔히 있는, 그래봐야 한 사람의 일생에서나 회자될 법한 것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아주 오래 전, 타국의 침략을 재빠르게 알아채고 국경선 사이의 작은 갈등으로 머물게 한 공을 세운 기사가 왕의 승은을 입었다는 것이다. 작은 우연과 행운이 만나 순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이야기들은 흘러간다. 적장의 피투성이 수급을 들고, 갑옷을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느니 영지의 거주민들의 입을 오가며 여러 작은 과장들이 덧붙여지고 난 뒤에는 누구나 좋아할 만한 우아한 이야기도 나돌았다. 큰 공을 세운 백작에게 왕이 국경선을 따라 자리한 큰 광산 사업을 맡기고 그의 눈색을 닮은 아쿠아마린을 물린 명검을 선사했으니 그 후손들은 모두 그 명예로운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아쿠아마린 장신구를 착용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저택의 아이들을 기르는 법칙이 있다. 넘치게 사랑하되 관대하지는 말 것. 가장 소중한 것들에게 잔인해지도록 할 것. 후회가 될 추억을 만들게 두지 말 것. 짐승처럼 길러 날카로운 검으로 자라게 할 것. 그리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권위에 순종하게 할 것.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가주의 조건이기도 했다. 슈발리에라면 누구나 본 받아야 할 엘로이 피델르 슈발리에의 상. 냉철하고 강단 있으며 미련을 가지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검이 될 것. 잔인한 조건은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공평했으나 그 이후에 따라오는 것들이 마냥 같지는 않았다. 

    

백작은 그 서재에 앉아 가주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수도 없이 읽어 닳아버린 페이지를 매만지고 넘기는 것도 오래지 않아 덮게 된다. 그는 자연스레 누이에 대해 생각했다. 

    

누이와 그는 반 조각 나서 태어났다. 나란히 놓으면 갈라진 틈 딱 맞아 이어졌고, 그 때문에 어릴 적엔 서로를 서로의 분신처럼 여겼다. 거기에 더해  늦은 나이에 가진 아이들이었기에 부모는 당연하게도 애지중지 두 핏덩이를 길렀다. 눈도 못 뜨던 시절부터 생일마다 사람들을 불러 설원의 저택에서 파티를 했다. 사이가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음꽃을 닮은 유리 조각과 광산에서 나는 은공예, 가문의 이야기를 맺는 푸른 보석들을 매단 저택 구석구석을 노니는 시녀와 시종까지 좋지 않은 것은 없었고, 실제로 그런 호화스러움은 어떤 이들의 행복이기도 했다. 그래서 행복하게 자랐나 하면, 어느 정도는 그렇다. 어린 아이들은 쉽게 속지 않아서,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쏟아지는 애정에 익숙한 아이일 수록 학습이 빨라 편애를 쉽게 알아차리고 와앙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빛이 범람하는 낮이 지고 밤이 오면 유독 기울어진 빛의 집단들이 선명하게 눈에 든다. 공평하게 흐를 것만 같던 샘들마저도 산비틀을 헤매이면 잔줄기가 되고 몇 몇은 멎는다. 마찬가지로,이 저택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 모두 각자의 설계된 쓸모를 부여받게 된다. 모두의 무게가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게 모두의 행복이 될 수는 없었다. 

    

    슈발리에의 여식은 장남과 장차 남편될 이를 보필해야 하니 행정학을 배우며 셈을 해야 한다. 장자는 가주의 의무를 일찍 마음에 새기며 무인으로서 몸을 가꾸어야 한다. 여자가 검을 쥐면 손이 모나지고 거칠어지니 사랑받지 못한다며 지양되었다. 애초에 마법과 그리 관련이 있는 가문은 아니었다. 왕실에 절대 복종하기 때문에, 로만 3세의 필요와 바람에 따라 두 쌍둥이가 워록이기를 바랐던 것 뿐이다. 종종 총명한 소서러나 워록을 아내로 맞는 일은 있었어도 마법사였던 가주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에겐 왕가에 쓰임받는 것이 가장 큰 명예였고, 새 시대의 왕은 새로운 인재를 바랐다. 두 부모는 아이를 애지중지 키웠다. 운이 좋아 둘 다 마법적 재능을 타고난다면 일찍이 서로의 패밀리어가 될 수도  있겠지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둘의 길은 정해져 있었다. 

    

    차라리 어릴 적 둘이 믿던 것처럼 서로 비슷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걸. 그릇의 크기는 다른 주제에 지나치게 운이 좋았던 것이 그의 탈이었겠지. 운이 좋아 장자로 태어나 운이 좋아 마법적 재능까지 가지고 태어났으니. 그렇다면 반대로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내리쬐던 적 없던 햇빛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녀는 그저 지독히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인가. 아니면 부모의 소원이 너무 가벼웠던 탓에 한 조각에 깃든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본래 한 조각이었어야 할 불운과 행운이 어쩌다 반으로 갈라져 태어나 버린 것인가. 억지로 검을 잡아 서툰 실력에 잔뜩 헤진 손바닥을 보면 백작은 뛰어난 수재나 천재는 아니었다.  그런 자신을 대신할 수도 있었던, 작고 날렵하고 뛰어났던 누이는 검을 잡고 싶다는 한 마디에 나가 떨어져 유년시절을 그늘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도 자신도 저리 내쳐질까 나서지 않았다. 둘도 없을 맹우라고 말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비겁한 외면이었다. 저택의 괴로움은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백작은 너른 등받이를 가진 의자에 깊게 기댔다. 젖살이야 진즉 떨어졌으나 아직 백작이라는 작위가 어울릴만큼 단단히 굳어진 인상도 아니다. 오히려 애써 어울려보려고 표정을 애써 굳혀보는 등의 얇은 수나 눈에 띄는 정도였지. 그는 피곤한지 눈을 감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자 시종들도 물러날 때임을 예감하고 몇 걸음 뒤로 한 뒤에 문을 닫고 나갔다.  창 밖에서 스며드는 빛이 흐려지더니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하늘이 먹먹하게 잠겨든다. 아마도 곧 이 일대에 드문 비가 올 것이다.  깨뜨린 유리조각처럼 뾰족하게 곧게 선 산기슭의 거대한 저택이 곧 젖는다. 말들이 짙은 습기를 미리 느끼고 푸르르, 하고 숨을 연신 뱉으며 성난 것처럼 발굽을 땅에 두드렸다.

 

    

    

2장. 

     

     

    열 세 살 되던 해, 내가 워록임을 안 부모님는 가정교사를 구하기보다는 일찍이 다른 아이들과 마법 이론을 공부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시에라의 사립학교에 보냈다. 가문 특유의 흰 마차를 타고가는 것은 딱 중간 까지고, 학교의 정문에 도착해서는 다른 아이들과 사륜마차에 세 명씩 옹기종기 앉아서 가야만 했다. 흰 마차에서 내리니 물 위의 연잎이 물결에 넘실거리듯 마차가 아주 조금 땅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어서 소란스럽게 몇 명의 시종이 짐을 풀어 짐마차에 묶기 바빴다. 그 동안 레이븐 에르메신데 엘로이 슈발리에는 낮고 높은 건물들과, 좁은 길. 또 그 사이 따라 난 골목을,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우연스럽게 같은 마차를 이용하게 될 어린 동기들을 살펴보았다.  스완이 없어... 불안한 표정으로 하나 둘, 말끔한 차림의 다른 아이들을 살펴보다 몇 걸음 물러난다.  스완없이 난 아무것도 못 할거야. 시종에게 가 지금이라도 돌아가자며 투정을 부리려던 찰나 성큼 다가오는 인영이 있었다.

    

"... 맞지? 맞지?"

    

    빙글, 빙글. 희고도 푸른 시선이 잠시 마주치고 다시 빙글 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보니 딱 제 키 엇비슷한 소년이다. 시선을 굴리고,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상대가 어리둥절하게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묻는다. 레이븐, 맞지? 

    

"응?"

"널 찾고 있었어. 카스토르 에카르트 주니어야."

    

    우리, 만났었잖아.  말없이 바라보며 기억을 되짚자 떠오르는 건 그보다도 더 어릴 적 기억이다. 저보다도 더 흰 머리칼에 조금 더 짙은 푸른 눈. 에카르트. 슈발리에와 조금 거리를 두고 맞닿아있는 또 다른 국경선의 영지. 기사들의 교류와 장인의 교류가 있었으니 아마 아버지들 만남 너머로 보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설원의 파티에 와주었거나. 내가 그에게 갔던 적은 없었던 것 같으니까. 곧 수긍하고 내미는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맞잡은 손이 아이다운 발랄함으로 흔들렸다. 그렇게 그와 일 년 즈음을 보냈다. 처음으로 누이와 오래 떨어져 지내는 동안 다정하기 그지없는 어린 친구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니 종종 기대고, 집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을 했다. 예를 들면, 상처투성이인 맨 손으로 누군가의 손을 꼭 잡아보는 일. 투정부리는 것처럼 달려가 와락 안겨보는 일. 어른의 품도 아닌 작은 어깨에서 울어보는 일. 널 지켜줄게, 하고 기사답게 맹세해보는 일. 그리고 환하게 웃어보는 일. 등등.

    

    그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타의에 떠밀리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았지만, 정작 떠밀리지 않는 순간에는 길을 잃고 정체되는 것이 그의 천성이었기에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의 벽이나 탑, 혹은 껍질만 남은 알. 속이 빈 씨앗 따위에 비유했다. 허술한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급히 둘러낸 자신의 껍데기가매우 조악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수고 싶게 만드는 기묘한 열망을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을 어떤 방향으로든 자각하고는 있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가온 사람들을 밀어내는 법만은 몰랐다. 그래서 다정한 이방인을 물리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망가졌다. 

    

아마도 그것이 탑의 첫 균열이다. 부모가 달가워하지 않는, 그리고 금지된 모든 작은 행복들은 카스토르 세르반 에카르트 주니어를 통해 왔다. 

     

"행복해보여."

"그래보여?"

"응, 아주 행복해 보였는데. 기쁘고, 즐겁고, 이 시간이 좋을 때 네가 짓는 얼굴."

    

    굳지 않은 반죽에 덧입혀진 문양들. 백지였던 종이에 그어진 한 줄 선. 벽의 흠을 파고드는 한 발의 화살. 아니면 아이들 장난거리인 나무 조각으로 쌓은 탑의 밑동을 몰래 빼버리는 일. 삶의 박자가 무너지자 부모님의 호통도 따라왔으나 그 이전에 그 본인이 느끼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피냐타는 두들겨패면 속에 든 사탕이 떨어진다지만,  그의 속은 텅 비었으니까 그 벽을 무너뜨린다고 카스토르에게 돌아갈 보상은 없었고, 그저 무너져내리는 것이 전부일 것만 같아 억울했다.

    

"더 흔들지마.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어."

"레이, 흔든 적 없어."

"아니야. 네 말들은 분명하게 날 흔들고 있어."

    

    대단한 우정도 아니고 이 정도야 스쳐지나가는 가벼운 인연에 불과하지 않나.  누구도 내 무엇이 되려 한 적 없었고, 나도 그 어떤 것도 내 삶의 '무언가'로 삼으려 든 적 없었는데 그는 달랐다. 처음으로 사귀어본 친우였던 그는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었고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수 많은 것들을 각각 마음 깊게 아끼고 좋아해주었다. 그것이 기만같이 느껴져 한 해가 흘러간 뒤에는 물러서 표정을 굳혔다.  그런 표정을 보고도 따라 물러서지 않고, 자꾸 유약해보이는 단어들을 자신에게 가져다 붙이는 것조차 이후엔 화가 났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말고... 좋은 이야기 하면 안될까?"

    

    몇번이고 그 곁에 있어서 행복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부딪혔다. 그 즈음 영지에 계시던 아버지의 병환이 악화되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슈발리에 백작 부부의 이름으로 몇 통의 편지가 왔고, 혹시 모르니 후계 수업을 위해 졸업 이전에 돌아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적혀있었다. 죄를 지은 것을 들킨 것만 같았고, 그 죄에 걸맞는 벌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까지 생각했다. 덜컥 겁을 먹은 뒤에는 그를 있는 힘껏 밀어내며 유예를 정했다. 애초에 스완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내 패밀리어가 될 수 없어. 그리고 그녀는 마법사가 아니야. 그러니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테고, 필요로 할 일도 없을테다. 

    

이상하게 밀어낸 뒤에는 그가 더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그것이 의아했다. 내가 가져본 행복은 그 하나 뿐이었지만, 그는 나 말고도 한참 많은 온갖 행복이 남아있을텐데 말이다.

    

성큼 다가온 겨울에 레이븐은 영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영지에 한 뭉치 일기가 적힌 종이들과 푸른 꽃이 전달되는 것으로 그 와의 인연도 끊기는 듯 했다.

 

 

 

3장.

어린 백작

 

 

 

 

    열 넷의 겨울에 시에라의 학교를 그만두고 영지로 돌아온 그는 열 다섯에 백작의 칭호를 받았다. 빈센트 르베르 엘로이 슈발리에 백작이 일찍이 타계하여 어린 누이와 그는 아버지를 일찍 땅에 묻어야 했다. 가문 역사 상 가장 이른 나이에 계승된 작위였고, 새 바람은 거셌다. 저택의 사람들은 후계자인 작은 도련님의 사지를 자로 재고 뼘 단위로 찢어보며 부합한 사람인지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노련한 정치가이자 기사였던 아비가 일찍 병을 얻어 죽었으니 한 순간 갈 곳을 잃어버린 일들과 연의 끈은 엄청난데 그것을 익힐 시간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그는 어설펐고, 종종 경박스러웠으며,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어린 아이였다. 이대로 세상에 내놓으면 뱃사람의 도마 위에 오른 생선처럼 회쳐져 딱 먹기 좋은 식사 한 그릇이 되겠지. 시종들은 어린 백작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이 결점을 모조리 매끈하게 갈아내고 말겠다고.

 

그는 아쿠아마린이었고, 칼날들은 그를 세공하는 마땅한 손길이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 이후 심적인 병을 얻어 기운이 쇠해 영지의 대리인 역할을 내려놓고 아들이 선발한 소수의 영특한 하녀들과 함께 칩거에 들어갔다. 레이븐은 졸업 학기에 접어듬과 동시에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와 영지에 머무르며 남은 일들을 정리해갔다. 그의 누이,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는 별도의 교육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집에서 어머니와 가정교사의 교육을 통해 온갖 행정학을 깨우친 바, 사병을 이끌며 국경을 수비하던 아버지 대신 영지를 관리해온 어머니의 일을 이어받아 처리해왔다. 누이는 틈을 파고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닫고 말았을 것이다. 모든 시선이 장자인 동생에게 꽂힌 틈을 타 그 그림자 안에서 제 설 발판을 다져가는 그 모습을, 어린 백작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네 행동은 아주 정당해. 백작은 곱씹었다. 

 

    이해할 순 없지만. 누이는 그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겪어온 끔찍함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는 아마 그 비극에 동참하지는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그 모든 억압을 용인하고 묵인해왔다. 서로를 분신이라 여겼으나 그 생각도 이미 어릴 적의 낡고 보풀진 추억이 되어버렸다.  너와 나는 너무나도 다르구나. 우리 모두 각자의 불운을 지고 있지만, 그 모양도 정도도 다르니 우리는 도저히 같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것이 한 때 무척이나 서러웠었다. 목소릴 낼 자신이 없다면 날 집어삼킬 아귀 안에 순순히 붙들려주는 것이 아마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일지도 모른다.

 

     저택의 사람들은 이런 관용을 의아하게 여기며 스완 유스티체 엘로이 슈발리에가 동생의 자리를 위협하려 들지 않을지 염려했다. 지독하게 아버지를 닮아버린 사고로 빚어낸 변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낡은 전통은 바뀌지 않는다. 

 

"스완, 네가 슈발리에의 이름을 지닌 이상 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아마도, 그래선 안돼. 그 생각만은 굳건했으니 탈선까지도 용인했다. 방관하며 침묵하니 주변인들은 그것을 지지로 읽어주었다. 그랬기에 아비가 죽자마자 저택의 1인자 자리를 꿰차고 앉아 펜을 놓고 검을 든 그녀를 아무도 비난하지 못했다. 칩거에 든 어미는 수그러들었고, 누이는 더는 주눅들지 않았다. 가문의 돈들이 어딘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가주가 된 그 곁에 눈과 귀가 따라붙었다. 그는 어떤 것도 잘라내지 않았다.

 

 

 

4장.

수도

 

 

    영지를 떠나야겠다. 봄에 그런 생각이 떠올라 짐을 싸두라 명했다. 어딘가에 갈 요량으로 싸둔 것은 아니고, 그냥 언제든 갈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대비로 말이다. 방의 한 구석에 트렁크를 쌓아놓으니 그것이 어깨에 닿을 정도로 거창한 양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생활은 판에 박힌대로 흘러갔고, 공허함은 점점 커져가니 이대로 명령 없이는 식사도 못하는 사냥개처럼 앉아서 낑낑거리다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 지 매일 밤 혼자 잠들면서 상상했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운명이라고 여기게 되어 사람들과 더욱 거리를 두게 되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접한 죽음은 슬픔보다는 공허에 가까웠고 그건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끝없이 왔다.

    

    그 때 레이븐이 가장 많이 시선에 두었던 것은, 받아두었던 한 꾸러미 종이뭉치다. 학교를 그만두고 도망치듯 돌아온 영지에 날아온 친우였던 그의 편지 같은  것. 편지라기보다는 일기처럼 여러 글을 엮어놓은 것 같았고, 허락된 것은 첫장 뿐이었다. 첫 장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모든 의무가 끝난 뒤에 읽을 것. 레이븐은 한 장을 오래동안 바라보다 한 장 뒤집을 것처럼 종이 끝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그대로 한참 짚고 있다가, 서랍에 넣어두고 잠궈두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설원의 저택을 떠날 생각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정확하게 로열 블루 유니온으로의 진학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길로 이끌어준 것은 여태까지 누려왔던 작은 행운과 누이의 제안이었다. 어머니까지 시에라의 저택으로 쫓아낸 뒤, 그 큰 저택에 사람이라곤 둘 밖에 남지 않았다. 뻐꾸기가 알을 밀어 떨어뜨리듯 누구 하나는 넘어질 힘 겨루기였고 그는 둥지를 비움으로서 사실 상 패배를 인정했다. 열 여섯살 되던 해 슈발리에의 말 여섯 필과 공단과 비단을 써서 만든 옷 다섯 트렁크와 어린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신 마흔 켤레, 온갖 식기와 서른 명의 시종, 그리고 슈발리에의 흰 세 마차를 준비해 시에라로 떠났다. 가문의 자금 중 일부가 백작의 개인 자산이 되어 떨어져 나왔다. 꼭 아주 작은 독립을 하겠다는 것 마냥 본격적인 움직임이었다. 남은 저택의 시종들은 모두 누이의 수족이었다. 그 해 오랜 가문의 충신들은 내쫓기고 저택은 그녀가 고른 새 시종과 시녀로 매꿔졌다. 그게 고통스러웠던 삶의 보상이 되진 못하겠지만.

    

    사실 시에라에 오면, 왠지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래서 그게 아주 두려웠어. 일방적으로 도망치기 급급했었던 과거의 자신이 그렇게 변하진 않아서, 로얄 블루 유니언의 입구에 저와 같이 번듯한 한 마차를 등지고 말끔한 푸른 옷을 입고 있는 그를 보자니 괴로워졌다. 빗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예감은 이럴 때만 적중한다. 아니면 나의 운명이랄 것이 원래 이렇던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지나치는 자신을 배려해주는 것처럼 첫 한 해는 서로를 기피하는 것처럼 피해다녔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자신이 먼저 등을 돌리고 먼 길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나무라지 않는 태도로 미루어보아, 레이븐은 카스토르가 완전히 자신을 포기했다고 결론내렸다.

    

' 이렇게 끝이 나도 괜찮은건가?'

    

    정말 이렇게 끝이 나면 너도 나도 이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시간을 돌린 것처럼, 마치 서로 알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것에 안심해야 할텐데 느껴지는 것은 불안감과 불만이라 스스로에게 의아함을 느끼고 만다. 포기해달라는 듯 굴어놓은 것이 자신이니 이제 와 다시 좋아해달라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기분은 정말 뭘까. 마치 어린 아이처럼 소중하게 쥐고 있던 것을 빼앗겨서 서러운 마음은.

    

    

'네가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내심 만들어낸 타협안은 결국 비겁한 변명이다. 남은 유예 동안이라도, 옛날 네가 내게 주었던 행복을 조금 이라도 더 누려보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너는 이렇게 복잡한 생각으로 내게 친절했던 것이 아니었겠지만, 내게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애정이었으므로 이렇게 고민하는 건 잘못은 아닐거야. 그런 마음으로 한 해가 끝난 뒤엔 2학년 때 그에게 먼저 다가가고야 만다. 탑의 밑동을 하나 더 빼내어 쌓아올렸다.

 

    

'그렇다면 내가 괜찮지 않을 이유도 없는데.'

 

    

    그렇게 무례하게 떠나놓고도 귀환을 바란 자신을 낯설어하지 않은 것이야 아니었으나 몇 번의 마찰 끝에 거절않고 받아들여진 것이 사실 레이븐 입장에서는 기적이었다. 이상하게 그는 조잡한 어리광에 약했고,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어쩔 수도 없다는 듯 불가항력처럼 다시 자신을 안아주었다. 그는 멍청하고 둔한 내가 던지는 언어의 화살에 어찌 되었든 꿰뚫리고 만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했고, 따라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지독한 침묵이 오가기도 했다. 나는 그의 무엇도 아니고, 그는 날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서로의 무엇도 아니다. 그것이 시에라에 찾아드는 밤마다 내가 되새기는 변명이었다.

        

    

    


(서사 상 애인은 아니지만 앤캐입니다~!)

Castor Servan Eckart Jr.

카스토르 세르반 에카르트 주니어

안녕, 친애하는 나의 예외.

나의 패밀리어.

나의 세계.

    

    

    

    로열 블루 유니언에 오는 일을 사실은 내내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으나 그 중 가장 기저에 있던 것은, 내가 소서러가 아닌 워록이라는 것. 그리고 워록의 뛰어난 재능은 사실상 패밀리어가 있을 때에나 유효하다는 것. 살면서 누군가를 신용해보려 노력했던 것만 세어봐도 실은 열 손가락이 채 되지 않는다. 필드를 여는 것이야 패밀리어 없이도 가능하다지만, 그건 문을 조금 열어 틈을 엿보는 것에 지나지 않고 나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지독하게 부담스러웠다. 그런 사람을 만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헬렌."

"왜 부르세요 백작님?"

"마법사를 본 적 있니?"

"아뇨... 백작님 뿐이에요."

        

    그렇지만 백작님은 워록이시고, 필드를 사용하실 수 없다고 하셨던가요. 그 말에 영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 앉아 내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 해가 끝났다. 나는 비겁하게 그의 곁을 점했고 그는 그것을 용납했다. 내 안의 남은 마지막 두려움이 있다면 서랍에 넣고 잠궈놓았던 한 뭉치 일기. 네가 적었다던 내 감상 같은 것들. 어느 순간 그것을 보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가주로서의 의무는 끝나지 않았으나 그것을 읽지 않고 네게 머무른다면 아마도 그건 기만일거라고. 

    

    영지에 도착해 바라본 저택은 생각보다도 더 낯설었다. 부모님이 떠난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아주 사소한 것부터 생활감과 온도까지 모두 익숙하던 것이 아닌, 한 사람 뜻에 따라 세공되어 가고 있는 듯 했다. 더 날카롭고, 더욱 더 빛나는 오묘한 느낌이 있는 걸 보아하니 말이다. 이름뿐인 백작과 영주라지만 이럴 때라도 들리지 않는다면 누이에게 어떤 소문이 따라붙을지는 자명하다. 결국 나의 이 묘한 머무름과 이제 이방인이 되어버린 나를 용인하는 그녀의 자비는 뒤틀릴대로 뒤틀린 우리가 서로를 배려하는 행위였다.

    

    나의 이 생각대로, 대부분 손길이 닿은 저택의 방 중에서도 영주의 서재만은 그대로였다. 역대 영주들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자리는 한결 간결해진 듯 했으나 그것이 거슬리지는 않았고 오히려 보기 좋았다. 떠날 때 두고 왔던 푸른 장미에 걸린 보존 마법이 희미해지고 있는지 유리병 안에 머물러있는 푸른 장미꽃의 잎들이 끝부터 검게 말라가고 있었다. 매끈하게 바니시를 칠해놓은 나무 바닥을 걸어 깊게 의자에 푹 기대어 앉는다. 시야의 아랫 쪽에 걸리는 작은 서랍이 있다. 

        

"바라지도 않은 행운인데 사실은."

    

  마법사라는 거 말이야. 물론 왕실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고, 가문의 위상이 선다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긴 하지만 나 자신은 그저 그런 기사 한 명으로 남아도 충분했을 것이다. 내면의 공허는 깊었으나 그 안에 뭔갈 던져넣는다고 그걸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망각에 가까웠지. 태어날 때부터 쥔 그릇은 손바닥만했고, 가문이 자신에게 요구해온 것들은 그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뭔가를 포기해야 겨우 받아낼 수 있었던 것들. 그의 경우에는 그것들이 사람에게 마땅하게 주어져야 할 행복과 추억이었다. 그리고 그걸 쓰레기처럼 내던지는 습관을 가지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손가락을 서랍에 걸고 연다. 넣은 이후로 자세히 살펴보진 않았으나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없다. 종이 뭉치를 집어드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예감이 들었다. 비이성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는 자신에게 그렇게 좋은 예감은 아니었다. 뭔가가 부서지고 있었다.

    

    


    

    

      창 밖에서 스며드는 빛이 흐려지더니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하늘이 먹먹하게 잠겨든다. 아마도 곧 이 일대에 드문 비가 올 것이다.  깨뜨린 유리조각처럼 뾰족하게 곧게 선 산기슭의 거대한 저택이 곧 젖는다. 일기를 쥔 어린 백작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아이다운 발랄함으로 작성된 다정한 어조의 모든 위로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느끼는 건 두려움이었다. 나의 세계는, 오직 그녀 뿐이어야 하고. 그녀를 외면한 시점부터 나는 홀로 지내야만 했었어. 그게 내가 자초한 하나의 재앙이었다.

    

            

    다정한 너는 이렇게 가볍게 탑을 무너뜨리는구나. 마지막 장을 읽고 꽤 두터운 그것을 쥐고 긴 코트를 입었다. 백작님 비가 옵니다,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세요. 하는 부름들을 적당히 내치고 숄을 둘렀다. 멀끔한 승마 부츠를 신고 나서 한 번 뒤를 돌았다. 시종들이 네 다섯 모여 어린 주인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든 작은 종이 꾸러미를 흔들어보이곤 품에 넣으며 에카르트 가에 볼일이 있다, 고 말하자 몇은 안심해 물러나고 몇은 마차를 준비해드리겠다며 달려갔다. 

    

저들 눈에는 내가 어딘가로 휙 사라져 죽어버릴 사람 같았나 보지.

    

    흰 마차를 준비한 마부가 저택의 입구 앞에 섰다. 그 마차를 누이가 자신의 방 창가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듯 희미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보다 금방 커튼이 드리워진다. 마차에 올라타려다 푸르륵거리는 백마의 재갈을 풀라 말했다. 마부가 당황해 마차에 연결되어 있던 말의 재갈과 연결고리를 풀고 안장을 단단하게 매기 시작한다. 거센 비가 쏟아지는 중이니 표정은 여전히 의아한 상태였다.

    

"직접 가시는 게 아니라 사람을 보내시려구요?"

"아니, 직접 갈거다."

"네? 그럼 마차는 어째서..."

"내가 직접 갈테니 저택 안에 들어가있어. 마굿간에 들러 건초를 싹 갈아주고 내일 아침을 대비해라."

    

     내일 아침 이 땅은 얼어붙는다. 시종이 둘러준 모포로 몸을 감싸고 흰 백마에 올라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말이 달리기 곤란한 내일 전까지는 네게 닿아야 해. 이걸 돌려줘야 한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바랬구나, 너의 이런 맹세를 바라고 비겁하게 굴었던 것은 아닌데. 나는 네게 이만큼의 무게로 다가갈 자신이 도저히 없어. 비가 쏟아지는 화살처럼 온 몸을 후려치고 꿰뚫는다. 빗방울이 거세니 드러나는 흰 살 부분은 점점 추위로 하얗게 질려가면서도 맞은 것처럼 부분부분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빗물이 속눈썹을 타고 흘러내려 눈물처럼 뺨 위를 기어다녔다. 바람이 모포를 꽉 쥐고 앗아가고,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꽤 추한 몰골로 저택의 앞에 도착하고야 만다. 도저히 귀족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젖어서 꼭 껴안고 싶지도 않게 보이는 것이 목표였다. 돌려준 뒤에는 작별 포옹도 할 수 없겠지. 안 그러면 네 새하얀 옷들이 다 젖고 말테니까. 말이 눈을 길게 감았다 뜨고 푸르르,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천천히 안장에서 내려와 그를 불렸다.

    

"카스토르 세르반 에카르트 주니어 백작 영식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 성함이?"

"... 급해서, 이런 몰골입니다만 슈발리에 백작입니다. 잠시면 됩니다."

    

    

 

    

    초라한 몰골에도 이름을 듣고 소식을 전해주기는 하니, 그게 드물게 느끼는 가문의 힘이다. 안내를 받아 걸어가니 낯선 저택의 입구다. 네 방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고, 찬 바람이 멎고 더운 고인 공기가 사지를 덮자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의 간지러움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마 품 안의 일기도 무참하게 젖었으리라. 네게 줘야할 것인데, 안타깝게도. 젖은 것을 꺼내들고 들어서자 서재에 앉아있던 그가 나를 보고 온화하게 웃으며 천천히 일어선다. 감상을 말하러 온 줄 아는 것처럼. 그게 왜인지 무척이나 슬펐다.

    

"읽었어?"

"... 응, 읽었어."

    

    물기가 똑똑 떨어지는 것을, 네 앞까지 걸어가 우악스레 네 손에 쥐여준다. 그리고 작게 미안해, 하고 속삭인 뒤에 망설임 없이 뒤돌아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한참 침묵이니 그게 답답해 잠시 고개를 돌린다. 그 때 물방울이 떨어졌다. 네 목소리도 그 작은 소리에 섞여 들렸다.

    

"가?"

"응."

    

    네 곁에 더 있다간 정말 못 잊게 될 것 같아서. 변명처럼 말하며 표정을 굳히니 곧바로 건내줬던 종이 뭉치가 제게로 날아온다. 한 걸음 옆으로 옮겨 피하고 곤란한 척 눈썹을 미미하게 일그러뜨렸다. 흰 속눈썹 사이로 물방울이 떨어져 눈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개를 숙이자 고저없는 가는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그냥, 네 존재를 무너뜨리는 어떤 것에 불과해서... 전부 잊어버린 거야?"

"잊진 않았어."

    

    말 틈 사이에 긴 공백이 있다. 뒷걸음질 치고 한 마디 더 뱉는다. 잊을거야. 그러니까... 아직 잊지 못했으니까. 정말 잊지 못할까봐 네게 이제라도 돌려주러 온 거니까. 추억거리가 될 것 따위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너와 나는 아직 서로의 무엇도 아니니까. 한 걸음 더 물러서고 또 한 마디 담담히 내뱉는다. 항상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잖아. 고저없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익숙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아직도 보기 괴롭다고 해야할지 모를 표정이 되어 너는 나를 노려본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 나는 항상 네게 이런 식으로 굴 거야. 네가 여기서 내게 등을 돌려도, 이젠 정말 어쩔 수 없겠지. 그렇지만 이런게 네게 독이 되고 너는 날 밀어내길 원한다면. 그럼 그냥 내가 포기할게. "

    

    우리의 이상은 합치될 수 없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네 서재 문고리를 꽉 붙든다. 다섯 손가락들이 새하얗게 질린다. 입술을 물어뜯는다... 그럼, 안녕. 카시. 웃음을 쥐어짜며 등을 돌리려던 찰나 말들은 마치 마지막 벽의 홈을 꿰뚫은 것처럼 쏟아진다. 그것에 관통당한 것처럼 가만히 서서, 그를 마주 보지도 못하고 그것을 듣고 있었다. 

    

"나는 널 만난 걸 후회해."

"... ..."

"널 지나치게 잘 알게 된 것도..."

"카시..."

"뭐든 알 수 있다고 자부할 만큼 가까워진 것도..."

"제발..."

    

"레이븐."

"... ... "

"거짓말이지."

    

    그 말과 동시에 뒤를 도니, 먹먹하게 감겨오는 것들이 일순간 사고를 휘어잡는다. 거짓말이지. 그 말에 결국 울게 된다. 비를 가르고 오는 내내 울었으면서, 바싹 마른 네 서재 안에서 네가 던지는 조각에 무참하게 찔리는 것처럼. 그래 거짓말이야. 무엇 때문인지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계속 눈을 비벼보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지척에 있던 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을 것만 같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겁을 먹고 주저앉는다. 조금씩 말을 떼는 아이처럼 중얼거린다.

    

"거짓말이야, 카시."

"... ..."

    

"널 잊겠다고 하는 것도, 넌 그저 날 망치기만 한다는 것도, 나는 너의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도."

    

    나는 너의 모든 것이 되고 싶었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그것이 겹겹 쌓여 어느 순간 미래가 되기를 바랐다. 그건 내가 잊어간 과거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내가 잊어간 것들을 찬란할 너를 통해 보고 싶었다. 팔을 휘젓는다. 어딘가엔가 닿는다. 아주 따뜻하고, 자신과 다르게 조금 말랐고, 껴안으면 미지근한 온도. 언젠가 내가 피난처로 삼았던 아직도 그리 크지 않은 품을 꽉 모아 안는다. 

    

"미안해. 거짓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왜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는 작은 확신이 들었다.

    


 

    패밀리어는 보통 사이가 좋은 사람들끼리 맺어지지 않던가. 헬렌이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턴가 한참 밀어내던 에카르트가의 도련님 곁에서 떨어지실 줄을 모르더니, 얼마 전에는 서로의 패밀리어가 되었다는 소식을 백작의 입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 오실 때 뛰쳐나가시고, 매일 근심 걱정이셨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자주 웃으시고 전보다 느슨하시니 꼭 파도에 쓸린 둥근 유리조각같이 빛나신다. 

 

뭐, 자세한 건 둘 사이에 얽힌 이야기겠으나. 아마 서로에게 무수히 부딪혀 상처입으며 맞는 조각이 되어간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어디선가 탄 냄새가 났다. 너무 오래 다린 탓에 옷 한 구석이 노릇노릇 잘 태워져 있었다. 하녀들은 지나가다 질겁하여 어린 주인의 옷을 들고 수선을 하러 달려갔고, 그것으로 졸업 학년에 접어든 하루도 다시 한 번 저물어갔다.

 

 

 


 

 


 

'프로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듀오:: 레이븐 에르메신데 슈발리에]  (0) 2019.05.01
[트레스:: 레이븐 에르메신데 슈발리에]  (0) 2019.05.01
로리 드와이트 :: 정의의 딜레마  (0) 2019.04.10
히스클리프 린튼  (0) 2019.04.10
박선유  (0) 2019.04.10

 

 


 

 

- 184, 62 (저체중)

 

 

 

 - 흑발, 녹안, 창백한 피부와 블루 블러드, 번견

 - 앙상한 오른 발목 복숭아 뼈 위, 둥근 표식 

 

 

 

     [밤이 사라졌다. 이어지는 환한 낮에 사람들이 미쳐가고 죽어나간다며 종일 조잘거리던 뉴스도 어느새 뚝 끊긴지 오래였다. 멸망인가, 생소한 단어를 끄집어 내 곱씹어보는 도중 지나친 사람들이 이젠 정말 10일도 남지 않았다고  중얼거렸다. 그런 것 치고는 길거리는 꽤 잠잠했다,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눈빛이 음울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그 뿐이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어딘가로 급하게 달려가는 사람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가득 채운 빛에 마음이 흔들릴 사람들은, 이미 다 죽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자 몸에 한기가 돌았다. 한기를 떨쳐내려고, 남자는 어깨를 부르르 떨고, 코트 주머니에 깊게 두 손을 처박고 걷는다. 한산한 뉴욕의 거리를 걷는 알베르토의 검은 머리카락은 어느새 어깨를 살짝 덮을 정도로 길게 자라 있었다. 

 

알베르토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 호출당했다는 쪽이 좀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찍어준 주소는 이 즈음이었는데… 별로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보도에 있는 펜스에 몸을 기대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카페 안에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곧 죽더라도 오늘은 기호식품을 챙기겠다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퍽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종이컵을 들고, 빵을 들고 자신의 플랫으로 돌아가기 바쁜 사람들을 오래 바라보다, 저가 찾아가야 할 사람을 찾았다. 한참 카페 앞에서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여자에게 가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못 봤을리가 없으니까. 유리창 안 쪽 창가에 앉아있는 그의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서 희게 빛난다. 언제 봐도 눈에 띄는, 이질적인 색. 그렇지만 그에게는 기가 막히게 어울려 신기하게 여기곤 했던 금발.

 

펜스를 짚고있던 손바닥을 탁, 탁 털고 바로 서서 카페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딸랑.

 

잘 빗어넘긴 머리카락, 구겨짐 하나 없는 깔끔한 수트. 작은 카페에 이런 차림으로 오는 뻔뻔함이란. 마주 앉아 티타임을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가 바로 앞에 서서 말한다. 내 말은 꼭 네 앞에 서면 더 날카롭고 모나졌다.

 

 

“ 무슨 일로 부른거죠. "

 

“ 명령입니다. “

 

 

틀린 것을 친절히 정정해주듯, 곧바로 튀어나오는 명령이라는 단어는 그와 나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해준다.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 따위는 없다는 이야기. 그래, 그의 말이 맞다.

 

알베르토는 잠시 말을 멈추고 테이블 위에 늘어진 빛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

 

 


 

 

 

 

 

- 5월 22일 생 , AB형

- 애연가, 애주가

- 양극성 장애, 꾸준히 약 복용 중.

 

 

내가 보스의 보좌일 적에 떨어지는 평가들은 이러했다. 삭막하고 대하기 불편한 보좌. 보기 싫게 말라빠진 남자. 전체적으로 칙칙한 인상에 움푹 파인 눈가에 묻어있는 나의 진한 다크서클도 한 몫했을 것이다. 나도 항상 인정하는 바지만 나는 절대 단정한 인상은 아니다. 나같은 비루먹은 것 같은 남자가 왜 보스 곁에 붙어있는지 이해 안간다는 이야기도 꽤나 들려왔다. 보좌라면 자고로 보기 좋게 잘 빠진 몸매의 여자에, 짧막한 미니스커트를 입힌 다음에 전화나 대신 받게 하면 되는 것 아니냐- 는 미개한 사고방식을 가진 놈들이 쉽게 쉽게 뱉는 말들이다. 

 

왜 보스가 나를 곁에 뒀냐고, 내게 묻는다면 답은 금방 돌아온다. 나는 일을 잘했다. 일 외에는 정을 붙이거나 정신을 팔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글을 겨우 깨쳤을 즈음에 고아원 원장은 엄마, 엄마 하며 잘 따르는 내게 귀찮다고 소리지르며 너희 부모는 스페인에서 넘어온 불법 이민자였고 너는 겨우겨우 미국 시민권을 받는 특혜를 받아 거둬진 애라 엄마 아빠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들어오는 보조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먹고 싶어서 아이들을 최대한 많이 거두고 수용해두는 원장은 그 말을 끝으로 품에 안고 있던 보드카 병을 벽에 던졌다. 그 이후로 원장을 애칭으로 부르는 아이들은 줄었다, 아니면 매질을 호되게 당했다.

 

애리조나 구석 자리에 위치한 그 고아원에 가려면 날을 잡고 별다른 시내도 없는 도로를 10시간 이상을 달려야 했기 때문에, 감사가 1년에 1번 올까 말까 했다. 그러니 원장은 허술한 감시 속에서 보조금은 받아넘기고 애들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여 뒷세계 조직폭력배나, 아니면 그저 부려먹을 값싼 아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거하게 받은 뒤에 근근히 사망처리하고 팔아넘겼던 것이다.  내가 넘어간 건 고작 8살 때 였다. 어느 날 룸메이트 였던 빈센트가 침대 위에 널부러진 낡은 베개 시트 하나와 요란한 손톱자국을 벽에 남기고 사라져 버린,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글을 읽을 줄도 알고, 말도 또박또박 잘합니다. 체력 상 모자란 것도 없고요. 애 얼굴도 곱상하니… 그런 용도로 쓰셔도 괜찮을 겁니다. 이게 원장이 알베르토를 묘사한 말이었다. 험상궂은 사람들이 검은 수트를 입고 와서 나를 한참 뜯어보고 턱을 잡아 이리 저리 돌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인 후에 거래가 성사되었다. 실종 신고는 그들이 날 데려간 후 한참 뒤에 행해졌고, 얼마 후에는 사망 처리도 손쉽게 되었다. 그 이후 그 고아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몇 년 뒤에 나와 똑같이 팔려들어온 놈의 말에 따르면 불이 나서 모두 타 죽었다고 한다.

 

말단이 나를 거둬온 이유는 뻔했다. 어릴 때는 설거지나 청소 같은 걸 죽어라 맡기다가 어느 정도 머리가 크면 대충 사격술이나 체술을 가르쳐 고기방패로 쓰기 위해서다. 빈센트도 언제 폭탄 조끼를 입고 적진 개구멍에 기어들어갔을지 모른다. 그 즈음의 나는 살고 싶었다. 최대한 늦게 자고, 최대한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죽 이어져오는 내 고질병이다. 다른  아이들이 체력 고갈로 쓰러져 배를 걷어차일 때 나는 눈치를 보며 내 손에는 턱없이 큰 장갑을 끼고 접시를 닦고, 그걸 전부 끝낸 후에도 시간이 남으면 아이들을 감시하는 놈의 구두를 윤이 날 때까지 닦았다. 하도 걷어차여 배가 터진 아이의 피가 묻은 구두 끝을 닦는 건 탐탁치 않은 일이어서, 아이들 사이에서는 따돌림 당하지만 간부들에겐 예쁨 받던 게 10살 때다.

 

일을 못하는 아이들은 아킬레스건이 잘려 사냥개들이 잔뜩 있는 지하실에 밥으로 던져졌다. 실수를 하는 아이들 중 좀 곱상하고 깨끗한 아이들은 윤간을 당했다. 알베르토는 제 생존과 연결된 일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해도 죽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둔감한 아이에 축했다. 뼈빠지게 일하고, 간부들이 가져오라는 것이면 마약이던 담배던 술이던 곧잘 가져다 바친 후에 불까지 붙여주었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쩔쩔매는 아이들을 제치고 조직 내 의사를 불러오고, 단정하게 생긴 제 얼굴에 발정하는 놈이 있으면 역겨운 티도 내지 않고 얌전히 손과 입을 빌려주었다. 알베르토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무리 말을 잘 들어봐야 며칠의 생존만 보장할 뿐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순 없다는 것이다. 위로 올라가야 했다. 저를 부리던 놈들과 같은 위치에 서야 했고 짓밟을 아랫 놈들이 필요했다.

 

언젠가 타 조직의 습격을 대비해 보초를 서던 놈이 너무 졸려 알베르토가 대신 총을 잡게 된 날이 있었다.놈은 꾸벅꾸벅 졸다가 침대에 엎어져 자기 위해 들어갔는데, 묘하게 술냄새가 났었다. 아 그래, 네가 할 건 별로 없고… 무슨 일 있으면 이 버튼을 누르고, 급한 게 아니면 무전기로 호출해. 그 짦막한 말과 리볼버 한 자루가 전부였다. 간부들은 나를 지나치게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걸로 자길 죽이면 어쩌려고.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12살 새파랗게 어린 소년병은 총을 장전하고, 가끔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똑바로 뜬다. 정적에 익숙해질 무렵, 갑자기 하늘을 찢는 소리가 나며 붉은 빛이 하늘을 가득 밝히며 뛰어올랐다. 섬광탄?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기둥 뒤에 숨어 총을 꽉 붙잡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벅, 저벅. 여긴 아무도 없네? 아무리 말단들 자는 곳이라지만…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굴러다니는 조약돌을 콱 차서 벽에 맞췄다. 숨소리가 들릴까 숨을 참았더니 심장이 목구멍에서 뛰었다. 트리거에 걸린 손가락이 무거웠다. 죽여야한다. 한 건할 기회였다. 기둥 뒤에 숨어 가는 눈으로 훔쳐본 남자는 멀끔한 차림이었다. 총 한 방이면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탕, 탕.  알베르토는 버튼을 누르고 한 발은 남자의 머리에, 나머지 한 발은 고아들의 숙소 벽에 쐈다.

 

사격이라곤 제대로 가르친 적도 없는데, 고작 12살일 뿐인데, 이렇게 말랐는데, 그렇게 말을 잘 듣는다고…

 

날 세워놓고 잠든 놈은 목이 따였다. 일개 업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말단의 최후였다. 호출 버튼을 누르자 부대가 달려왔고 덕분에 조직에 직접적으로 들어온 피해가 적었다고 했다. 나는 살고 싶었기 때문에 잘 명중한 첫발 이후로는 선두에 서지 않았다. 그냥 보이는 구석의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서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쏴죽일 준비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날이 밝으니 밖이 조용했다. 살아남은 것이다. 어젯밤의 혈전에 잠시 휘말려 손에 묻었던 말라붙은 핏덩이를 긁어내며 걸어나오는데,  낯익은 남자가 날 불렀다. 보스가 부르신다. 뭘 잘못했나 생각할 여유도 없이 불려간 보스의 방은 지금까지 봐온 방 중 제일 크고 아름다웠다. 말로만 들어온 아브라함, 뒷세계를 호령해온 남자는 허리받침이 높은 의자에 앉아 뒤돌아 앉아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황송한 것 마냥 고개를 숙이고 멍한 눈을 비린내 나는 손으로 꾹꾹 눌러 부볐다. 눈가에 바스러지는 검붉은 가루들이 느껴졌지만 털어내거나 닦아낼 정신은 없었다.

 

“ 그래… 네 이름이 — 라고?"

 

네, 눈을 두어번 깜빡인 뒤에 한 번 더 기계마냥 고개를 까닥여 숙이고 어느새 의자를 돌려 바로 앉은 남자의 얼굴을 그제야 바로 응시했다. 밝은 금발에 회청색 눈. 살벌한 소문을 이고 사는 남자의 얼굴을 상상할 때마다 나는 언젠가 보았던 정말 무서운 우락부락한 살인자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었는데, 이 남자는 가까히 가도 비린내는 커녕 값비싼 향내만 날 것 같은 미인이었다. 그 외모에 잠시 정신을 팔고 입이 조금 벌어지던 사이, 남자의 입에서 퍽 다정한 투로 한 마디가 더 툭 떨어진다.

 

네가 누굴 죽였는지 아나?

 

아니요.

 

그 날 습격한 조직의 고위 간부였다. 정말 운이 좋았구나. 그런가요. 차려입은 꼴로 봐선 막연하게 누군가 중요한 인물일거라고 상상은 했지만 그럴 줄이야… 픽 쓰러져 엎어지는 꼴이 대단해보이진 않아서 그냥 말단 중에서도 좀 중요한 똘마니겠거니, 이 일로 나도 훈련을 받을 수 있겠거니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날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뭐든 걸 다 꿰뚫어볼 것 같은 날카로운 눈이었다. 군림에 익숙한 지배자의 눈. 넌 대단한 일을 한거야. 단순한 고기방패 이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거지. 그동안 묵묵히 참고 견딘 것들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지는 그 날카로운 눈빛을 알베르토는 오랫동안 마주하고 있었다. 보스는 그에게 5년간의 훈련과 조직에서의 입지를 확실히 약속해주었다. 큰 피해를 볼 뻔 했던 곳에서 뛰어나게 대처하고 빠르게 행동해 쓸모를 보인 댓가였다. 

 

살고 싶었다. 남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생존이었다. 명예도, 아니면 돈도 아니다. 기본적인 생존이 보장된 곳에서 살아보지 못했기에 남자는 생이 무엇보다 중했다. 가끔 어떤 놈들이 기도를 하거나 묵주를 돌리는 걸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고 알베르토는 말했다. 흐릿한 사후세계보다는 지금 손에 잡히고, 잠들었다 깨어나도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 5년의 훈련이 그에게는 길지 않았다. 일어나면 일정이 있고, 잠들면 꿈을 꾸고. 권태를 가질 틈도 없이 사는 게 너무나 익숙했다. 눈가의 다크서클은 점점 짙어져만 갔고, 성인이 되기 전부터 담배를 안 주머니에 넣고 새벽마다 나와 줄줄 태우고 잠들었다. 생존을 위한 버릇들은 안정된 공간에서도 무뎌지지 않았다. 넌 훌륭한 보좌가 될거다. 그게 5년을 마무리 지을 즈음 내 실적을 전해들은 보스가 한 말이었다

 

사격술, 체술, 그리고 언변술. 그리고 어디에나 쉽게 묻히는 검은 머리카락과 옅은 존재감이 한 몫했다. 3년 간 보스 직속 부대에서 마약 운반과 공장 관리를 맡아 뛰어나게 일처릴 해냈다. 기가 막히게 장부를 빼돌리고, 건물을 불태우고 추격을 따돌리는 솜씨를 보며 조직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제 자릴 빼앗았다며 이를 가는 놈들도 있었지만 대개 뒷돈을 빼돌리거나, 정부 쪽에 신원을 들켜 미행이 붙은 뒤론 더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된 패들이라 위협이 되진 않았다. 너무 수월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그의 삶은. 물론 밑바닥부터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었겠지만.  보스는 알베르토를 보좌 자리에 맞게 키워냈고 진짜 그가 스물이 되었을 때 그의 보좌로 들였다. 밑바닥을 구르던 인간을 유독 신뢰하는 걸까. 아니면 배신할 구석도 없는 천애고아라서? 같이 길러졌던 고기방패들은 이미 작은 살점이 되어 세상을 하직한지 오래라고 들었다. 스무 살까지 살아남은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한 편으론 여기에 무슨 뜻이 있는 걸까 궁금해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떨어진 일들을 열심히 했다. 

 

첫 1년은 괜찮았다, 버틸만 했다. 밤샘을 하면 코피가 터졌지만 그건 닦으면 끝나는 사소한 일이었다. 툭하면 터지는 눈가의 핏줄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꼼꼼히 일을 하고, 그냥 어떻게든 깡으로 버티면 되는 거였다. 그냥 그러면 되는거였는데. 2년 째에 일이 터졌다. 얼마 전 임무를 나갔다 죽어 돌아온 놈의 신원확인을 대강 넘긴 탓이었다. 직속 부하들은 뭔가 수상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그 즈음 알베르토의 과로 증상이 심해져 약을 먹고 쉬던 즈음인데다, 치열이 전부 부서져 신원 확인 조차 확실히 할 수 없어 그냥 대충 묻고 넘겼던 게 화근이었다. 괘씸하게도, 알베르토가 꽤 아끼던 그 놈은 사실 정부 쪽에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자신을 대신할 시체를 구해다 혼자 쇼를 했던 것으로 밝혀져 그가 관리하던 지부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장부를 비롯해 관련 자료들이 유출되었지만, 필사적으로 언론에 힘을 넣고 알베르토가 사비로 정부 기관 쪽 첩자들에게 뒷돈을 넣어 핵심 자료가 넘어가는 것을 간신히 막아냈다. 뒷처리를 대충 했다고 해서 유출된 자료들이 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장부가 넘어갔으니 핵심인물 둘 셋은 면목이 있어서라도 잡아낼 것이다. 알베르토는 곧장 호출되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니 시혜적인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들려왔다. 

 

“그래.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건지 변명이라도 해봐."

 

아니, 뭐 말해봐야 내 결론은 같지만… 책상 앞에 바로 선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온 몸을 굳게 했다. 그동안 제치고 올라온 ‘버릴 패’ 가 이번엔 자기 차례인 것이다. 덜덜 떨리는 다리에 빠듯하게 힘을 주어 동요를 감추고 눈빛을 갈무리했다. 덜덜 떠는 모습을 보여줘봐야 좋을 게 없다. 그야말로 쓸모없음의 반증이니까. 어릴 때 본 얼굴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여전히 미인인 아브라함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 생각해보니 넌 그동안 충실한 내 번견이었지. 네가 몇 년만 좀 더 만족스럽게 버텼더라면 내 장남에게 널 붙여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벌써 한계였다니, 조금 실망이구나. 그에게 있는 두 아들이 생각났다. 장남은… 거의 후계자 확정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지지세력이 강해서 다들 차남은 찬밥 취급하는 분위기였다. 그 두 부모도 마찬가지였으니, 조직원들은 어떠했으랴. … 널 내 차남에게 붙여주마. 목숨줄 부지해서 다행인 줄 알아. 그리고 더는 용건이 없으니 나가보라는 듯 젓는 고개에 나는 몇 번을 발버둥 치고 보스의 이름을 불렀던 것 같지만 가드들이 날 문 밖으로 내쫓았다. 보스…! 그렇게 한 번 더 외치고 방문을 열어보려던 그 순간, 고개를 돌린 그곳에 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잊을 수가 없다. 그래, 이게 바로 [제임스 밀레니엄], 나의 베르테르와의 첫 만남이다.

 

 

 


 

Werther 베르테르 

 

그는 나의 주인이자 번견, 상처이며 칼, 희생자이며 처형인이다.

 

차남은 생각보다 단순한 사람이었다. 소문만 듣고 긴장했던 나는 타이를 다시 단정히 매고 그의 옆에 서서 묵묵히 걷고, 여전히 일을 처리했다. 차남은 찬밥 신세라는 말이 맞기는 맞는지 그에게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단순하거나 아니면 쓸모없는 일이었다. 하면 좋고, 아니어도 타격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밀 문서에 접근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전처럼 무작정 코피가 터지고 병원 신세를 급히 지는 일은 줄었다. 그가 부리는 사람이 저 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이 작은 도련님은 오만하기 짝이 없고, 아직 실전에선 미숙한데다 지나치게 상처받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인 그는 얕보이기도 쉽게 얕보이곤 해서 장남 측 지지자에게 쉽게 암살 의뢰 대상이 되곤 했다. 그는 그 때부터 나와 함께 잤다. 내가 권한 것이었다, 혼자 잤다가 시해당하거나 순식간에 숨통이 끊기면 어쩌나 싶어서. 그는 처음엔 어색해 하더니 몇 번 같은 방에서 잠을 청한 후에는 익숙해졌는지 딱히 거부하진 않았다. 단 한 번도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이 작은 남자가. 내가 아직 조직에 남아있을 수 있는 마지막 명분이었다. 너무 약해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썩은 동아줄, 그렇지만 내게 남은 마지막 패. 

 

같은 자석의 상극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그와 나는 닮지 않은 듯 하면서도 같은 속성을 지녀 서로를 밀어냈다. 내가 그에게 배치된 게, 내게 내려진 벌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는 더 심해졌다. 가장 약한 치부인 밤을 공유하는 주제에 그는 욱하면 총구를 내 머리에 가져다 대고 죽여버릴 듯 굴었고 그럴 때면 나는 빠르게 장전한 권총을 손에 쥔 채로 한참 만지작거렸다. 버림받은 사람들끼리 싸우다 죽어버리는 것 만큼 웃긴 건 없을텐데. 내가 그를 돕기 위해, 그의 재기를 위해 떨어진 줄 알았었던 이 남자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줘봐야 상처만 받겠지. 그에게 매정한 말이 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냥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비린 웃음을 그에게 던져주고 코웃음쳤다. 그는 날 죽이지 못한다. 외로우니까. 여전히 해가 지고 밤이 왔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꿈을 꾸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었다. 항상 홀로 치르던 일과는 그대로였으나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베르테르와 내 일상 반 쪽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지나갔고, 나와 그는 성과를 올리고 모습을 계속 내비추는 데 목표를 뒀다. 장남에게 별 생각 없이 붙어 한 자리 달라며 구애하던 멍청한 놈들은 몇 년을 거치며 내가 건져온 몇 개의 큰 건수가 보스의 눈에 들자 금세 베르테르에게 붙어 꼬리를 흔들었다. 권력의 세계는 생각보다 솔직하다. 일한만큼 사람은 따랐다. 그에게 가르친 호신술과 언변술도 몇 해가 지나자 적당히 쓸만해졌다. 보스를 보좌한 기간보다 긴, 4년을 함께 하며 그의 세력 확장을 도왔다. 그의 힘이 곧 나의 생존이었으니 세력은 클 수록 좋았다. 나는 오래 살고 싶었으니까.

 

내가 키운 도련님은 아직 별볼일 없지만 굳건하게 뿌리를 뻗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순조롭게만 몇 년 더 움직이면 장남과 엇비슷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느 날 보스한테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내게 밀회를 요청하고 싶으신 듯 했다.

 

"알베르토, 많이 컸구나." 

 

“네, 덕분에 많이 배우고 성장했습니다."

 

“네가 유능한 덕분에 내가 곤경에 처했지만 말이다."

 

그 때 그냥 네 목을 쳤어야 했는데 말이지. 잔인한 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식사를 권하는 말처럼 그의 입에서 뱉어져 나왔다. 그에 동요할 만큼 어린 아이도 아니었고, 그의 용건이 그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태연한 낯으로 더 이야기 해보라고 답하자 아브라함은 헛웃음을 쳤다. 넌 오래 전 내 유능한 번견이었지. 네, 그랬죠. 넌 여전히 내게 목줄 들린 놈이다. … 네, 그럼요 보스. 

 

“그래. 알고 있다니, 말이 잘 통하겠구나."

 

내가 무슨 말을 할 줄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보스가 명령한 것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였다. 내 숨통을 조일 속셈으로 붙여주었던, 내가 다 키워놓은 그 남자를 배신하고 정보를 흘려 장남 쪽에 붙으라는 이야기였다. 참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사람을 어떻게 하면 비참하게 굴릴 줄 아는 남자였다. 베르테르는 내 작품인데, 내 손으로 부수라니. 하지만 거부하면 몇 번이고 암살자가 따라붙겠지. 몇 번이고. 그리고 베르테르도 얼마 못 가 고꾸라지고 말 게 붙명했다. 그를 내가 죽여야 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 보스는 고개를 저었다. 작은 함정이면 충분하다고. 실패를 다시 맛보게 하면 무력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라고. 나는 그의 말을 믿고 따랐다. 익숙한 방법으로 그를 유인했고, 그는 속았다. 아마 덫에 걸린 뒤에야 그걸 놓은 게 나라는 걸 알았겠지만. 보스 앞에 불려온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섰을 때, 나는 장남 곁에 서서 말 없이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옛날처럼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다. 조용히 찾아온 내가 인사를 건내자 몇 번이고 비웃으러 왔냐며, 꺼지라고 실소를 터트렸다. 당신을 살릴게요. 도와줄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분노는 그런 약속으론 가라앉지 않았다. 그가 화난 모습은 몇 번 봤어도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 방을 떠나려고 할 때 그제야 그 거만한 입에서 절박하게 터져나오는 그의 고백이…. 우습기도 하고, 퍽 익숙하기도 하고… 

 

“날 살리겠다고 말하십니까, 난 당신을 죽일 겁니다."

 

“ 제가 없어도 당신과 당신 세력은 이어집니다. 뜻대로 하세요."

 

“당신 목숨은 내 겁니다. 오직 나만 취할 수 있어요, 알겠습니까?"

 

[뜻대로 하세요. 내 하나 뿐인 작품, 제임스 밀레니엄.]

 

 

대놓고 그와 보좌인 나의 관계가 파토났다고, 떠들고 다니기엔 (이미 너무 공공연연한 비밀이었지만) 그는 아직 어렸고, 약했다. 여전히 대외적인 상황에서 그는 담뱃불을 붙이고 위스키를 따라주고 대신 일을 도와주는 행동대장이자 보좌관이었다. 그렇게 된 뒤로 나는 다시는 베르테르와 같이 자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는 같이 자지 않을 생각이었냐는 듯 굴었다. 좋아 … 뭐. 같이 잔다고 해도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 죽은 듯 잠을 청하고 새벽에 겨루는 것 마냥 누구 하나 일어나는 대로 이불에서 벗어나 씻으러 갔으니 동침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겼다. 그래도 매일 밤 침대에는 사람 한 명 분의 온기가 더 있었다. 그게 불안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정의의 전조로 인해 밤이 사라진지 30일 정도 지난 후였다. 지속되는 백야 현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미쳐갔고, 우리는 알람을 맞춘 뒤에 밤이어야 할 시간에 짙은 벨벳 커튼을 치고 인조적으로 밤을 만들어 내 치부를 함께했다. 어느 날 밤 일과를 마치고, 커튼을 친 뒤에 두꺼운 천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만이 방을 메우고 있을 때. 그 때 나는 내가 표식자임을 알았다. 그냥 발목에 햇빛이 비친 것이겠거니, 하고 소파에 깊게 누워있던 그의 발목, 앙상하게 마른 복숭아 뼈에 둥글고 빛나는 표식이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침묵이 서로를 가르지르고, 베르테르가 요새 이상하게 통 벗지 않던 가죽장갑을 벗어 보여준 둥근 표식을 보고 나는 탄식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나를 다른 곳에 배치했다. 이젠 그를 돕는 수하들도 늘어나 굳이 내가 담당할 필요가 없는 잡무긴 했다, 호위 같은 건. 그렇지만 너무 속보이는 수여서. 나를 대놓고 피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제 구역에서 쫓아내 버린 것이다. 

멸망이 가까워오자 조직 내에서도 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표식이 새겨진 곳을 붕대로 감싸고, 긴 양말을 신고. 전조가 뜬 낮같은 밤에는 밖에 되도록 나가지 않았다.

 

 

멸망 1달 전. 나는 휴가를 내고 칩거하기 시작했다. 딱히 베르테르의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던데다, 단 한 번도 휴가를 내거나 쉬어보지 못한 나는 나른한 감각이 정말로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는 원래 안 하는 짓을 한다더니. 나도 딱 그 꼴인걸까.

 

그 때 개인 연락용 핸드폰의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제 손으로 키운 그 도련님, 베르테르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명령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써가며 자기를 보좌하라고 했다. 목줄을 놓아준다나. 내가, 그에게로 부터 벗어나길 바랐던가? 잠시 피어오르는 의문도 잠시. 멸망도 코 앞에 다다른 이 순간, 망설일 게 뭐가 있나 싶어서 수락한다. 당신 뜻대로 하세요.

 

 

그렇게 두 남자는 저택으로 향했다. 비행기 안에서 알베르토는 멸망이 고작 5일 남았는데도, 하늘에는 전조가 가득 찼는데도,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자유가 무엇인지 내내 생각해보고  있었다. 

 

 

린튼가의 사람들은 모두 미쳐있었다.

 

이들은 마법 사회의 규칙을 가장 근본부터 매우 불만스럽게 여겼다. 본인들의 탐욕을 채우기엔 마법 사회가 너무 좁다는 것이 그 근원되는 이유 중 하나로, 순혈이라면 아주 진저리를 쳤다. 

 

"피라는 것은 순결할 수가 없지. 애초에 몸 안에 고여있을 때나 가치있는 것으로, 흘러나오면 그냥 의미를 잃은 오물일 뿐이다."

 

히스클리프는 적당히 고개를 까닥였지만 왜 동의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다. 이런 '린튼'이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피를 잇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무척이나 탐욕스러웠다. 저택의 지하에는 갯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집품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히스클리프는 그 소문의 절반쯤은 인정했다. 저택은 금으로 뒤덮혀 있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은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매우 세밀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뿌리가 된 선조가 남긴 막대한 자산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이 저택에 사는 사람들은 이 저택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웃곤 했는데, 모두 걸음걸이가 술에 취한 한심한 떠돌이처럼 들떠있었다.

 

그래.  '린튼'은 모두 미쳤어. 생각하며 히스클리프는 킬킬거렸다. 굳은 살이 박힌 흰 손가락 사이에 얇게 말린 잎담배가 끼워져 있었고, 그 끄트머리가 한참 타들어가 회색 잿더미가 매달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는 검지로 담배를 호되게 후려갈겼다. 재가 공중에 흩어졌다.

 

히스클리프 래디언트 린튼은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다. 금발의 머리는 잔뜩 뻗쳐 있었고, 본인도 그것이 짜증스러운지 담배를 쥐지 않은 손의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잔뜩 엮어 빗는 것처럼 계속 넘기다가 온 몸의 힘을 풀며 침대에 아예 드러누웠다. 

 

방은 린튼의 저택 가장 높은 곳에 있었고 동시에 이 저택에서 가장 검소한 모양을 한 방이기도 했다. 우선 쓸데없이 넓지 않았고, 전시를 위한 유리 옷장이 없었다. 체리나무를 사용해 만든 모든 가구들은 히스클리프가 첫 월급으로 마련한 값싼 중고였다. 그 방은 그야말로 활력이 넘쳤다. 모든 가구에 사람의 흔적이 묻어있었으며, 출근하고 돌아온 후에도 꼭 아침에 걷고 나온 구겨진 이불이 바닥에 늘어져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했다. 동시에 아침의 가장 밝은 햇살이 닿는 방이기도 했으며 겨울이 오면 가장 추워지는 방이었다. 문만 열면 굳은 핏덩이만큼 붉고 푹신푹신한 금실 자수가 놓인 양털 카페트가 보이는 이 저택과 비교해보자면 완전히 동떨어져, 머글의 집 한 구석을 떼어다 억지로 붙여놓은 것처럼 보였다.

 

자연스레 의문이 들만도 하다. 히스클리프 래디언트 린튼은 다른 '린튼'과는 다른가?

 

그는 탐욕을 모르는가? 아니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침대 맞은 편에 걸려있는 방의 유일한 장식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빛이 도는 푸른 눈은 침대에 앉아 담배를 피울 때 가장 번뜩거렸다. 담배 연기를 입 안에 머금고 목으로 넘기지 않고 점막으로 한껏 받아들인 뒤에 코와 입의 구멍으로 하염없이 빠져나가게끔 두면 머리가 핑글 돌며 아주 배고파졌다. 그래서 침대 옆에는 항상 재떨이가 있었고, 서랍에는 까지 않은 땅콩 과자와 초콜렛이 몇 개 씩 쌓여있었다. 그는 배고픔을 느끼고 싶어서 매일 담배를 피웠다. 정확히는 배고픔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 담배가 필요했다. 

 

히스클리프는 배고픔을 죄악시 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일종의 일탈이다. '린튼' 답게 광기를 느끼는 시간인 것이다. 금과 보석에 흰자가 보이도록 눈을 뒤집는 가족들이 미치도록 짜증스러웠던 까닭에 남자는 이렇게 앉아 침대 너머의  황금 밧줄을 볼 때마다 불경한 생각을 했다. 밧줄로 원수의 목을 조른다면 어떨까. 담배를 비벼끄고 눈을 감았다. 흰 생각덩어리들이 떠돌다가 펑펑 터지며 빙글빙글 돌고 점멸해간다.

 

 

 

 

 

린튼 .

 

 

린튼은 고고학을 업으로 삼는 가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고고학이라는 것은 비-마법사 사회로부터 건너온 개념으로, 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명명한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린튼의 선조의 무료함과 예술품에 대한 소장욕이 가문의 뿌리가 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딜레탕트로 여겨지기 십상인 그들이 스스로를 포장하기 위해 들여온 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린튼은 극도의 탐미주의와 물욕을 자랑하는 수집가 가문이다. 이는 오래 전 부터 부유한 비-마법사 사업가들과 교류하며 수집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다. 마법사들의 문명 그 너머까지도 탐험하기 일쑤인지라 비-마법사에 대한 특별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인식이 다소 시혜적이라 다른 마법사들로부터는 괴짜 취급을 받아왔다.

 

수집품을 모으는 기준으로는 아름다운 외관이 물론 으뜸이나 이들은 물건에 엮인 이야기의 가치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런 열정은 가끔 학구열과 맞물리곤 했다. 따라서 이 가문의 선조들은 직접 개발한 특수 감정 마법을 사용해 비-마법사 유적에 남겨진 마법의 흔적을 추적 및 기록했는데, 오래 소장본으로 존재하던 이것이 공개되며 출판 된 뒤로 유럽 전역에 알음알음 이름이 알려지고 린튼은 유명해졌다. 

 

탐험은 두근거리는 단어지만, 이 탐험이라는 것은 종종 평온을 들쑤시는 성가신 침략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따라서 린튼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운 도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수위만 유지하며 수 세기에 걸쳐 탐험에 탐험을 거듭해왔다. 발견,약탈,도굴,거래 해온 고대 마법적 유물의 수집량은 지금 대에 이르러서는 집계 불가능할 수준이 되었다. 달마다 서신을 마법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린튼에게 비공식적인 자문을 구하거나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 위해 고가의 거래를 하기도 한다. 당연히 상당히 부유한 편이다.  

 

아주 깔끔하다고 말하긴 어려운 사업이라 이러한 수집품들로 전시회를 주기적으로 저택에서 열어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꽤나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나 결국 사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의 변명에 불과하므로 특수한 제작을 위해 유물 중 일부를 해체하여 거래하고 있다. 

 

볼드모트의 세력이 힘을 펼치던 시기 가장 조용히 수그리고 숨어든 사람들 중 하나가 린튼의 사람들이다. 품에 끌어안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고, 그것을 단번에 내던지고 전장으로 뛰어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린튼 가에게 우호적일 수 밖에 없는 거물 거래 상대들에게 비굴해보일 정도로 노골적인 뇌물을 바쳐가며 자신들을 향할 화살들을 최대한 돌리는데 집중했다. 이 당시 린튼의 그림자를 벗어난 유물들이 상당한데, 그 중 대부분이 행방이 묘연하다. 특수한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한 재료로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린튼의 대부분은 거대한 불의에 맞서는 행위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비마법사 사회와의 교류가 끊기며 가문에게  타격이 있었던 까닭에 영원 전쟁 당시, 역설적으로 마법사 우월주의 따위에 동조한 사람도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던 린튼의 가주에게 이런 내부의 혼란은 끔찍한 균열이었다. 수 세기의 역사가 어이없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가득차 있었던 히스클리프의 조부에게 발키리는 린튼에게 구원이나 다름 없었다. 종전 이후 다이애건 앨리의 재건을 위한 후원금을 거액 기부한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장장 10년간 이어진 전쟁에도 린튼의 아이는 자라났다. 마찬가지로 린튼의 모험은 멈추었으나 거래는 멈추지 않았다. 무너지고 멈추는 것들 사이에서도 이어져야 할 것들이 있었고, 현재까지 지켜진 것들은 절대 당연하지 않았다. 유년기를 전쟁의 불안 속에서 보냈던 히스클리프의 아버지, 요한 린튼의 가업 유지에 대한 강박적일 정도의 불안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머릿 속 타이머가 텅 빈 초점을 잡아쥐고 끊임없이 숫자를 지껄인다. 원석을 잡은 손가락은 그 투명한 수의 가지런한 열을 가늠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거친 면이 벗겨지고 돌의 나신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두운 남자의 쪽방 작업실 한 켠의 조명 빛이 수명을 다하려는지 심히 비틀거리다 이내 번쩍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멎어버렸다. 친구의 죽음이 서러웠는지 타이머도 덩달아 수 세기를 멈춰버렸다. 머릿 속이 텅 비어버리는 감각은 별로 달갑지 않다. 짙은 한숨이 한 차례 쏟아진다. 그래도 그만 둘 순 없지. 이제 빛이라곤 창 너머 순환선 따라 나란히 심어진 누런 가로등 빛 밖에 남지 않았건만 그 쪽방에선 새벽 내내 돌 가는 소리가 끼익끼익 새어나왔다.

 

동이 틀 무렵의 남자는 눈을 감고 낡은 나무 책상 위에 누워있었다. 어젯 밤, 돌을 갈 때부터 영문 모를 한 마디가 머릿 속을 뛰어 노니고 있다. *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 ... ,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 입을 열어 발음해봐도 육성보다는 손가락의 타이포로 의사를 표현하는 데 더 익숙해진 까닭인지 굳은 혀가 짧은 한 단어도 뱉어내지 못하고 움틀거림은 잦아든다. 문장의 출처를 알 수가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잠들었다.

 

해가 뜨면 이불을 빨고 밤이 되면 밥을 지어 먹어야지. 그와 같은 일상으로 오래 밥을 해주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저 같은 카페에 같은 시간에 방문해 같은 자리에 앉고 싶어 했다는 이유만으로 만나게 된 사람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___는 러시아 어를 썼고 나는 한국어를 썼다. 서로의 이름조차도 발음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던 사람과 밥을 먹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Да.  그래, 라는 말을 뜻도 모르고 내가 발음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한 끼를 같이 먹고, 무슨 말 일지 모를 ___의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___는 자주 웃는 사람이었고, 나는 대화에 둔한 사람이라 나란히 앉아 있으면 맞지 않는 신발 짝 두개를 가지런히 정리해둔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네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방도가 없었다. 결국 할부 삼 년 남은 액정에 요란히 금이 간 핸드폰을 꺼내 한 문장을 적었다. 네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 Думаю, ты мне нравишься. ___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Спать хочу. 무슨 말일지 알 수 없는 웅얼거림. 밥을 먹고도 돌아가지 않는 그를 위해 볕에 말린 이불을 걷어와 침대 위에 두텁게 올려주었다. ___가 웃으며 중얼거리다 눈을 감는다. 밤새 작업을 할 요량으로 낮에 한숨 잤던 나도 그 모습에 계획조차 잊고 그의 옆으로 파고 들어 누웠다. ___가 내 허리에 손을 감으려고 했다. 문득 무서워져 등을 돌리고 누웠다. ___가 손가락으로 내 등골을 노크하듯 두드린다. 그래도 답이 없자 이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읽지도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___는 그렇게 말 한 마디 없이 내 가족이 되었다. 아침이 되면 밥을 하고, 밤이 되면 이불을 빨기 시작했다. 나는 돌을 가는 일을 잠시 멈추고 3번 서랍 바닥에 놓여있던 다이아몬드 하나를 팔아 두 사람이 먹을 밥 값을 벌었다. ___는 내가 어떻게 ___를 먹여 살리고 있는지 궁금한 듯 했다. 그러나 언어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___의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Думаю, ты мне нравишься. 나는 그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___가 어느 날 밤 내 곁에 나란히 누워 속삭인 말이었다. 익숙한 울림은 아니어서 나는 또 다시 내게 뭔가를 묻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동그랗게 뜬 내 눈을 보고 ___가 조용히 웃더니 내 뒷목을 끌어잡고 입맞추기 시작한다. 알 수 없네, 무슨 뜻인지. 혀를 섞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러워졌다. 키스는 더듬거림이 되고 더듬거리는 손길은 몸을 타고 내려가 곧 섹스로 이어졌다. 빛에 익숙하지 않아 불을 자주 끄고 살았던 나는 어둠이 야속한 것은 또 처음이었다. ___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До свиданя... 서뉴. ___가 남긴 마지막 말은 그것이다. 나는 ___의 이름을 궁금해 한 적도 없는데 ___는 내 이름을 꾸준히 물어봐 결국 어눌하게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항상 매고 있던 크로스백을 좀 더 두툼히 챙기고, 목도리까지 맨 채로 눅눅한 목소리로 내게 뭔가 더듬거리며 말해오는데, 그것이 문득 작별인사처럼 여겨져서 나는 ___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До новой встречи... Я смогу встретиться снова... 내가 끊임없이 고개를 저어도 ___는 처참하게 웃고 있었다. 

 

"#@!$&!@@#*@...&@$#@!#?"

(돌아올거지? ... 돌아올거지..?)

 

꿈을 꿨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온 몸이 간지러웠다. "오래 자네." 흠칫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 없는 애인이 모로 누워 사랑스럽게 웃고 있다. 애인의 손가락들이 허공에 떠 내 가슴을 만지고 있다. 나도 반사적으로 흰 살덩이를 붙잡고 쓰다듬고 주무르다 종지에는 울어버린다.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을 해줘. 내게도 좋은 꿈을 보여달란 말이야. 혼자서 멍청하게 웃지 말고.

 

꿈을 꾸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책상에 선처럼 가만히 누워있고 창 너머로 해가 뜨고 있다.

 

 

 

* 요조,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