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머릿 속 타이머가 텅 빈 초점을 잡아쥐고 끊임없이 숫자를 지껄인다. 원석을 잡은 손가락은 그 투명한 수의 가지런한 열을 가늠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거친 면이 벗겨지고 돌의 나신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두운 남자의 쪽방 작업실 한 켠의 조명 빛이 수명을 다하려는지 심히 비틀거리다 이내 번쩍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멎어버렸다. 친구의 죽음이 서러웠는지 타이머도 덩달아 수 세기를 멈춰버렸다. 머릿 속이 텅 비어버리는 감각은 별로 달갑지 않다. 짙은 한숨이 한 차례 쏟아진다. 그래도 그만 둘 순 없지. 이제 빛이라곤 창 너머 순환선 따라 나란히 심어진 누런 가로등 빛 밖에 남지 않았건만 그 쪽방에선 새벽 내내 돌 가는 소리가 끼익끼익 새어나왔다.

 

동이 틀 무렵의 남자는 눈을 감고 낡은 나무 책상 위에 누워있었다. 어젯 밤, 돌을 갈 때부터 영문 모를 한 마디가 머릿 속을 뛰어 노니고 있다. *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 ... ,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 입을 열어 발음해봐도 육성보다는 손가락의 타이포로 의사를 표현하는 데 더 익숙해진 까닭인지 굳은 혀가 짧은 한 단어도 뱉어내지 못하고 움틀거림은 잦아든다. 문장의 출처를 알 수가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잠들었다.

 

해가 뜨면 이불을 빨고 밤이 되면 밥을 지어 먹어야지. 그와 같은 일상으로 오래 밥을 해주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저 같은 카페에 같은 시간에 방문해 같은 자리에 앉고 싶어 했다는 이유만으로 만나게 된 사람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___는 러시아 어를 썼고 나는 한국어를 썼다. 서로의 이름조차도 발음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던 사람과 밥을 먹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Да.  그래, 라는 말을 뜻도 모르고 내가 발음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한 끼를 같이 먹고, 무슨 말 일지 모를 ___의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___는 자주 웃는 사람이었고, 나는 대화에 둔한 사람이라 나란히 앉아 있으면 맞지 않는 신발 짝 두개를 가지런히 정리해둔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네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방도가 없었다. 결국 할부 삼 년 남은 액정에 요란히 금이 간 핸드폰을 꺼내 한 문장을 적었다. 네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 Думаю, ты мне нравишься. ___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Спать хочу. 무슨 말일지 알 수 없는 웅얼거림. 밥을 먹고도 돌아가지 않는 그를 위해 볕에 말린 이불을 걷어와 침대 위에 두텁게 올려주었다. ___가 웃으며 중얼거리다 눈을 감는다. 밤새 작업을 할 요량으로 낮에 한숨 잤던 나도 그 모습에 계획조차 잊고 그의 옆으로 파고 들어 누웠다. ___가 내 허리에 손을 감으려고 했다. 문득 무서워져 등을 돌리고 누웠다. ___가 손가락으로 내 등골을 노크하듯 두드린다. 그래도 답이 없자 이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읽지도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___는 그렇게 말 한 마디 없이 내 가족이 되었다. 아침이 되면 밥을 하고, 밤이 되면 이불을 빨기 시작했다. 나는 돌을 가는 일을 잠시 멈추고 3번 서랍 바닥에 놓여있던 다이아몬드 하나를 팔아 두 사람이 먹을 밥 값을 벌었다. ___는 내가 어떻게 ___를 먹여 살리고 있는지 궁금한 듯 했다. 그러나 언어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___의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Думаю, ты мне нравишься. 나는 그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___가 어느 날 밤 내 곁에 나란히 누워 속삭인 말이었다. 익숙한 울림은 아니어서 나는 또 다시 내게 뭔가를 묻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동그랗게 뜬 내 눈을 보고 ___가 조용히 웃더니 내 뒷목을 끌어잡고 입맞추기 시작한다. 알 수 없네, 무슨 뜻인지. 혀를 섞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러워졌다. 키스는 더듬거림이 되고 더듬거리는 손길은 몸을 타고 내려가 곧 섹스로 이어졌다. 빛에 익숙하지 않아 불을 자주 끄고 살았던 나는 어둠이 야속한 것은 또 처음이었다. ___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До свиданя... 서뉴. ___가 남긴 마지막 말은 그것이다. 나는 ___의 이름을 궁금해 한 적도 없는데 ___는 내 이름을 꾸준히 물어봐 결국 어눌하게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항상 매고 있던 크로스백을 좀 더 두툼히 챙기고, 목도리까지 맨 채로 눅눅한 목소리로 내게 뭔가 더듬거리며 말해오는데, 그것이 문득 작별인사처럼 여겨져서 나는 ___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До новой встречи... Я смогу встретиться снова... 내가 끊임없이 고개를 저어도 ___는 처참하게 웃고 있었다. 

 

"#@!$&!@@#*@...&@$#@!#?"

(돌아올거지? ... 돌아올거지..?)

 

꿈을 꿨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온 몸이 간지러웠다. "오래 자네." 흠칫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 없는 애인이 모로 누워 사랑스럽게 웃고 있다. 애인의 손가락들이 허공에 떠 내 가슴을 만지고 있다. 나도 반사적으로 흰 살덩이를 붙잡고 쓰다듬고 주무르다 종지에는 울어버린다.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을 해줘. 내게도 좋은 꿈을 보여달란 말이야. 혼자서 멍청하게 웃지 말고.

 

꿈을 꾸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책상에 선처럼 가만히 누워있고 창 너머로 해가 뜨고 있다.

 

 

 

* 요조,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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